루터가 발견한 복음: 전부를 주시고 전부를 구원하신 주님
안상혁 교수(합신, 역사신학)
‘올 투 올(All-to-All)의 복음’은 루터의 십자가 복음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또 다른 표현
통곡하는 오스카 쉰들러
1993년에 개봉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기억하시나요?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에서 헌신적인 노력으로 유대인들을 구해낸 한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이야기는 관람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가 살려낸 1,100명의 유대인들과 이들의 후손 6,000여 명이 소개될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쉰들러가 베푼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쉰들러의 유대인들’은 그에게 작은 금반지를 만들어 선물합니다. 노동자 한 사람이 자원하여 자신의 금이빨을 뽑아 만든 반지입니다. 이들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곧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라는 탈무드의 경구를 반지에 새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의외입니다. 이 반지를 두 손으로 받아든 쉰들러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자책하기 시작합니다. “이 자동차를 팔았더라면 열 명은 족히 더 구해낼 수 있었을 거야.” “이 금배지를 가지고는 두 명을 더 살릴 수도 있었어.” 이윽고 그는 오열합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 나는 그렇지 않았어.”
전부를 주신 우리의 구원자
“다 이루었다.” 십자가상에서 주님께서 크게 외치신 말씀입니다.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죽음의 자리로부터 귀중한 사람의 생명을 구해내었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는 두 명의 구원자의 모습이 왜 이처럼 다른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구원자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의 생명, 곧 전부를 주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반면에 쉰들러는 자신의 일부만을 헌신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쉰들러는 자신을 탓하며 한 없이 통곡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에게 전부를 주신 주님은 또한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37) 본문의 깊은 의미를 처음 깨달았을 때 젊은 루터는 깜짝 놀랐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속마음을 향해 명령하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수도승이었던 루터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로마서강해』서문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율법은 세상의 법과 다르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속의 상태를 보고 이에 따라 우리를 판단하신다. 그의 율법 또한 우리 마음의 중심을 상대로 명령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가장 깊은 속마음과 무관한 외면적 순종에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시116:11 말씀은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고 선언한다. [타락한] 사람은 그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도, 혹은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루터 자신은 ‘못된 나무’임이 분명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열매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루터는 자신을 ‘흠 없는 수도사’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서 겉으로 잘 보이게 맺히는 열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띄지 않게 뿌리에 맺히는 열매도 있습니다. 마치 감자나 고구마가 땅 속에서 열매 맺는 것처럼 미움이나 욕정 등은 그의 마음에서 나쁜 열매로서 쉬지 않고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내면에서 못된 열매를 맺었으니 자신은 못된 나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이처럼 ‘가장 깊은 속마음’(the inmost heart)의 세계 안에서 루터는 매 순간 나쁜 열매를 맺는 부패한 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한편 못된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7:19)는 말씀은 루터에게 자신을 엄중하게 심판하는 무서운 선언으로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 때문에 늘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루터는 마침내 성경 말씀 속에서 복음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 자신의 생명, 곧 전부를 주어 우리의 전부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전부를 주셨으니 우리의 전부를 구원하신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 곧 나쁜 열매를 맺고 있었던 나무 자체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주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의’(롬1:17)입니다. 또한 성육하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애초에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는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도 결국 전부를 주시고 우리의 전부를 살려내시는 전인적(全人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올 투 올(All-to-All)의 복음’은 루터가 발견한 십자가 복음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