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르비딤 전투와 영적 전쟁 _ 남웅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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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르비딤 전투와 영적 전쟁

 

<남웅기 목사 | 바로선교회>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보여주며

아론과 훌은 기도의 조력자라기보다 리더십의 조력자

 

성경엔 전쟁 기사가 많다. 그 중에서도 출애굽기 17장의 아말렉과의 전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 기이한 승리는 물론이거니와 그 싸움의 방법도 특별하다. 더욱 하나님께서 굳이 아말렉만을 영원한 적으로 삼으신 것(출 17:16)을 보면, 그 전쟁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아말렉과의 전쟁은 사울 왕 시대(삼상 15장)에도 있었다.

그로 인한 혼돈을 피하고자 출애굽 당시의 이 아말렉 전쟁을 이 글에선 르비딤 전투라고 하겠다. 르비딤은 바로 그 전투 현장이기 때문이다. 당시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군중은 정예병으로 무장한 아말렉과 도저히 전쟁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결국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기적 같은 승리를 했던 것은 당연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었으니까.

그런데 전투의 방법이 특이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직접 전투 현장에 내 보내면서, 자신은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꼭대기에 올랐다. 이때 전황은 전적으로 모세 손에 달렸다. 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전세가 뒤바뀌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에 그 팔이 피곤하여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온종일 모세의 팔을 떠받쳤던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톺아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 모세가 손을 든 행위를 곧잘 기도행위로 설명하지만, 사실 본문엔 모세가 기도했다는 어떤 직접적인 표현도 없다. 물론 모세나 아론과 훌이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는 모든 언행은 기도를 배제할 수 없고 기도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모세가 손을 들고, 아론과 훌이 보조한 그 일을 기도사역으로만 보느냐는 것이다. 굳이 손들고 기도해야 응답받고, 또한 높은 곳에서 부르짖어야만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오늘날 기도에 대한 이런 오해도 심각한 편이다. 성경기록엔 모세가 다만 손을 든 행위밖에 없다. 우리가 그 행위를 지레 기도로 오해한 것은 두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 하나는 그로 인해 기이한 전쟁 승리의 역사가 나타났기 때문이요, 또 다른 이유라면 그 행위를 기도하는 모습으로 연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할 때 모세의 팔만 보느라고 그 손을 주목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성경에 밝혀진 건 없지만, 당시 모세의 오른손엔 지팡이가 들려 있었음에 틀림없다. 출애굽 여정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모세의 지도력은 바로 그 모세의 지팡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놓칠세라 성경도 이미 언급했다(출 17:9하).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지팡이를 들고 높은 산에 올라간 모세가 손을 들고 있었다면, 그 지팡이는 모세의 손에 들려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그 중요한 지팡이가 외면당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당시 아론과 훌의 사역은 기도가 아닌 다른 의미의 사역일지도 모른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때 모세가 그 현장을 ‘여호와 닛시’라 부른 것은 그곳이 여호와께서 진두지휘하신 곳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들고 선 지팡이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아론과 훌은 기도의 조력자라기보다는 리더십의 조력자라 함이 마땅할 줄 안다.

우리가 성경의 의미를 재해석함으로 교훈을 받는다면, 르비딤 전투는 영적 싸움임에 틀림없다. 주께서 아말렉을 저주하시며 우리에게 싸움을 독려하신 걸 보면(삼상 15:3), 아말렉은 곧 우리의 대적이다. 즉 우리의 신앙생활을 좌절케 하는, 죄의 유혹과 사탄의 책동인 게 분명하다. 영적 전투라면 우리는 먼저 기도와 신유와 방언과 축사(逐邪)의 현장을 떠올리게 되는데, 영적 전투란 바로 내 영혼의 순결을 위한 죄와의 싸움을 말한다. 당시 그들이 하나님나라를 상징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전투현장은 교회임에 틀림없다.

사실 교회만큼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교회마다 르비딤 전투의 승리를 노래하긴 하지만, 실제 영적 전쟁의 실상은 참담하다.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교회의 리더십과 동떨어진 채, 강단과는 단절된 채, 각개전투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삶의 현장에서 싸우는 개인 성도의 모형이라면, 모세는 담임목사를, 아론과 훌은 자연스럽게 당회나 제직회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목회자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드는 의지가 약화되고, 당회나 제직회는 아론과 훌의 역할에 미진하고, 성도들은 영적 싸움을 포기한 지 오래된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개인 영성운동이 곧 영적 전쟁인양 착각하면 안 된다. 기도가 필요하지만 자기의 소속진영을 확인하는 게 시급하다. 당시 이스라엘의 운명을 가름했던 것은 여호수아의 선택여부였다. 누구 진영에 설 것인가가 싸움의 성패를 갈랐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다면 영적 전쟁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톺아보다: 샅샅이 훑어가며 살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