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섬기며
엔지도 있어야 엔지도 산다
<지정범 전도사 | 열린비전교회 협력>
은혜 안에서 엔지(No Good)들을 더 품어 주면
엔지(Next Generation)들의 달리기가 버겁지 않다
개혁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자로 풀어서 그 뜻을 살펴보면 고칠 개, 가죽 혁. 무언가를 고쳐나가는 탈바꿈의 변화가 얼마나 가죽 껍질을 뜯어고치는 고통과 어려움을 수반하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익숙한 것들에 가급적 안주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새로움을 찾아내고 추구하는 고민과 노력은 또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생각들이 새삼 떠올려진다.
그런 개혁적 탈바꿈의 변화가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익숙함을 버리는 새로움의 노력이 아무리 쉽지 않다고 해도,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든 바꾸고 새롭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든 새로움의 시도들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낄 때가 있다. 최근 교회를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다음 세대 청년들의 모습을 볼 때가 바로 그렇다. 교회마다 주일학교 학생 숫자가 급격히 준다고 하고 그나마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되면 그 중에 또 반 이상이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위기라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다음세대는 말 그대로 지금이 아니라 다음의 세대를 의미하니까 그런 고민들이 막연한 불안감 정도의 수준을 맴돌다 당장 발등의 불로 떨어지는 일들 속에 그만 묻혀 버리는 것은 아닌지 아픈 마음의 발만 동동 구르게 된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들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청년들과의 다양한 만남에서 느끼는 한 가지 안타까움은 NG(실수, 실패) 없는 N.G.(다음세대, Next Generation)를 향한 기성세대로부터의 기대와 압박이 그들을 너무나 힘들고 오히려 무기력하게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든, 그렇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마음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청년들이든 함께 얘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그들 마음에 무겁게 채워져 있는 두 가지 모습을 본다. ‘짜 맞추기’ 아니면 ‘주눅 들기’-. 이런 결과가 나와야 된다고 박수 받는 모범답안이 정해져 있으니까 자신에게도 그런 비슷한 결과들이 있었노라고, 가끔씩은 약간의 과장도 좀 섞고 거기서 어긋나는 실수와 실패의 모습은 가급적 감추면서 어떻게든 거기에 짜 맞추기 하는 것이다.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들에 비교해서 그렇게 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주눅 들어 위축된 신앙에 빠져버리기도 하는데, 그런 두 가지 마음 모두 결국은 영적 공허와 혼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부분에서의 힘든 마음을 가중시키는 것이 시대적 상황이다. 엄청난 속도의 변화와 그로 인한 불확실성 속에서의 치열한 경쟁-. 사회학자들은 지난 100년간의 변화가 그 이전 인류역사 전체의 변화에 맞먹는 것이고, 앞으로 20년 동안 일어날 변화는 다시 또 그것보다 더 큰 변화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변화들의 결과로, 그동안 있었던 길들은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길들이 계속 생겨나게 되는데, 없어지는 길들의 마지막 낭떠러지에 서게 되는 역할은 역설적이게도 좁아지는 과정에도 실수하지 않고 그 길에서 버텨 낸 슬픈 승자들의 몫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 한편 끊임없이 생겨나는 새로운 길에는 일부 선구적 개척자들이 안정된 길을 버리고 그 길에 도전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는 역시 역설적이게도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길을 찾다가 그 새로운 길을 먼저 찾아 들어서게 된다. 이미 그런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더욱 빨라지는 변화 속도를 생각하면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우리 교육 현실은 각종 시험에서 실수하지 않고 점수 잘 받아 내는 방법을 배우는 데 집중되어 있으니까 새로운 길에 적응하고 도전하는 창의성과 그에 따르는 시행착오의 극복훈련은 충분히 되어있지 않은 채 새로운 환경과 조건을 마주치며 치열한 경쟁을 감당해야만 되는 것이다. 안전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시대는 점점 창의적 야성을 필요로 하면서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맷집과 내공이 너무나 절실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보면 교회에서 인정받는 신실한 청년의 모습은 모나지도 않고 어긋남도 없이 착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의 정해진 틀에서 예나 지금이나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혼탁한 세상에서 세속적 풍조에 휩쓸려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는 중에 너무나 많은 기독 청년들이 점점 무기력에 빠지면서 신앙인으로서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깊은 방황에 빠져드는 것은 아닐지? 진리의 초점에는 단순 확고하되, 다양하게 펼쳐지는 각자들 삶의 과정을 향해서는 폭넓은 유연성과 포용과 인내의 시각이 정말 많이 필요해 보인다.
그동안 청년사역의 시간들을 가지며 생각하게 된 것 중에 하나는 가르침과 깨달음이 1이면 기다림은 몇 십, 몇 백이라는 것이다. 아기들 기저귀 뗄 때 보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고 이렇게 하니까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도 있겠지만 그리고 나서도 실수와 실패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성장의 과정을 밟는 것을 본다. 한 아이가 보통 몇 번이나 기저귀를 차는지 헤아려 보니 대략 3천 번쯤 되는 것 같다. 3천 번을 그렇게 미숙한 행동을 반복하는데 그 때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미안해하면서 갈아 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한 영혼의 성장 과정에서는 두세 번 실수하고 실패하는 모습만 보여도 왜 그렇게 용납하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는 완고함과 조급함이 있을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의 물줄기가 옹달샘 샘물에서 시작되어 계곡을 지나 강물을 거쳐 바다로 흘러간다고 하면 청년의 시기는 계곡쯤을 지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커다란 바위 하나에도 굽이쳐 돌고 급한 경사를 만나면 폭포로 미끄러졌다가 한 차례 폭우에 길을 잃기도 하고 그렇지만 결국 강줄기를 향해 제 길을 찾아가는 꼬불꼬불 곡선의 시기를 지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결국 바다로 나아가는 그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 주는 힘이 있는데 바로 중력이다. 마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의 손길과 같다. 그 은총의 힘이야말로 하나님 자녀의 삶에 중력처럼 변함없이 강력하게 변함없이 작용하는 능력 중의 능력임을 우리는 믿는다. 물줄기가 계곡을 지나며 꼬불꼬불 곡선으로 흘러가듯 인생의 여정도, 신앙의 과정도 꼬불꼬불 곡선을 통과한다. 그 과정의 경로도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모습도 천차만별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다양해야 맞다. 그런데 그만, 이렇게 하면 무조건 절대 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몇 가지 경험과 몇 가지 지식에 맞춰 직선 딱 그어놓고 그 폭을 좁혀 놓으니 둘 중에 하나, ‘짜 맞추기’ 아니면 ‘주눅 들기’의 수렁으로 그들을 자꾸만 밀어 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생각하게 된다.
달리면 달릴수록 마주치며 저항하는 거센 맞바람처럼, 인생과 신앙의 길에도 도약과 도전의 생명력이 있기에 마주치고 부딪히는 실수와 실패들이 있다.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 은혜의 손길 안에서 그런 엔지(No Good)들을 훨씬 더 품어주고 훨씬 더 헤아려 보살피는 신뢰와 인내의 폭을 어떻게든 넓히지 못한다면 우리의 엔지(Next Generation)들이 달리는 달리기가 점점 더 버거워만 보인다. 이 치열한 시대를 믿음과 소망으로 고민하며 함께하는 모든 성도님들과 사랑하는 다음세대 청년들의 분투와 건승을 기원한다.
* 지정범 전도사 _ ACTS M.Div. 독일 아헨공대 공학박사 (주)이지스톤 대표. 저서로 ‘숯검댕이 뛰는 가슴’, ‘텅 빈 가슴에 무지개를 띄워라’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