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 김수환 목사, 군포예손교회 >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김일성 부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위대한 것”
어느 날 아침 어떤 사모 한 분이 교회로 출근하는 목사에게 간단한 침구 한보따리를 내어밀며 “오늘부터 집에 올 생각 마시고, 교회 강단에서 계속 지내시지요” 라고 말했다 합니다.
갑작스런 아내 행동에 화가 난 그 목사가 퉁명스럽게 되물었습니다.
“아침부터 무슨 얘기야, 기분 나쁘게…”
그러자 준비해 놓은 듯 사모의 답변이 바로 이어졌습니다.
“당신은 강단에서 설교할 때에만 천사 같고, 목사님 같으니까 강단에서 내려오지 말고 아예 거기서 계속 사세요. 그래야 내가 좀 살 것 같네요.”
설교하는 강단의 목사와 강단 아래에서의 목사 사이를 너무 큰 삶의 간극으로 만들어 낸 가슴 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천이 없는 목사의 강단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모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슬픔을 추가합니다. 아니, 목회자 자신의 권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가장 소중한 동역자인 아내의 내조를 약화시킵니다. 주님이 제1호로 맡기신 양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인간이고, 사람이라고…” 항변해 보고 싶지만, 합리화 시키려는 이성의 얄팍한 계산은 이미 그 진정성을 간파해 버린 신앙 양심 앞에 힘을 잃고 맙니다.
수많은 오늘 날 우리의 설교들이 마치 방송용 멘트처럼, 아무런 감동도 없이 스러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1주일에 1-2시간 강단의 목사만 바라보고,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아닌 매일 매순간 목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사는 사모들에게 은혜를 받고, 뭇 성도들에게 신앙의 귀감이 되며, 목사의 마음에 드는 내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을까요?
「지킬박사와 하이드」소설 못지않은 우리 목회자들의 이중성은 우선 가까운 가족들, 특히 아내에게 가장 큰 폐해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기에 사모에게 존경을 받고, 매주일 그 사모에게 은혜를 끼치는 목사는 훌륭한 목회자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어쩌다 한 번씩 감동을 주는 것은 비교적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뒤 따르지 않으면 은혜는커녕 오히려 큰 고통과 괴롬만 줄 뿐입니다. 아니 자칫 한 영혼을 실족케 하는 불행한 사태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말로 천국을 가르치고, 말로 천국을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천국을 살아내고, 그 천국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는 목회자들은 눈에 잘 띠지 않습니다. 만일 목사들이 강단에서 설교한 대로 천국의 실재를 살아낸다면, 가장 먼저 은혜를 받고 가장 많이 감동해야 할 사람은 바로 사모가 아닐까요? 가장 행복해야 할 분이 바로 사모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은혜의 사각지대, 행복의 사각지대가 바로 우리 사모들의 영혼이 아니던가요?
처음 예수 믿고 목회자가 된 이후, 더욱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가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무척이나 기도했었습니다. 그리고 만나기라도 한다면 목을 끌어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약간의 어려움도 없이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으로 북받치곤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내 신앙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실천 가능한 것은 애써 외면하면서 어차피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이용하여 괜찮은 신앙으로 포장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김일성 부자에게 사랑을 외치고, 아프리카의 영혼 구원을 운운하는 것은 외식하는 신앙의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디 아내에게 천국을 말로만 설교하지 말고, 직접 삶으로 천국을 보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차가운 아내의 가슴에 천국의 꽃이 피어날 것이며, 과분한 목양의 내조자가 될 것입니다. 강단에서 내려와 사택에서 잠잘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김일성 부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어야 할 여지가 없고, 마냥 미루거나 핑계를 댈 수 없는 가장 실제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생이 죄 짓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목회를 할 수 있을까요? 설교를 책임질 수 있을까요?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누구를 감동시키고, 누구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인가요? 하물며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아내가 아닌가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갈 2:20)하는 원초적 십자가 복음의 삶만이 무너진 우리의 강단을 회복시키고, 마음으로 떠나간 사모들을 가정과 교회의 진정한 돕는 배필과 내조자의 자리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당신의 사모님은 안녕하십니까?
십자가 복음으로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사모를 목회하십시오! 당신 자신을 목회하십시오! 천국의 실재와 함께, 목회의 대로가 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