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전상서
< 윤순열 사모, 서문교회 >
“지금은 우리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깨어 기도할 때”
따사로운 봄날 용산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지인의 딸 결혼식에 갔다가 너무 일찍 도착한 덕분에 기념관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견학 온 학생들로 왁자지껄 하였습니다.
기념관 입구에는 낯선 이국땅에서 목숨 바쳐 한국을 지켜준 21개국 나라들과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어 내 마음을 숙연케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필리핀과 에디오피아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쟁으로 초토화 되었을 때 한국을 도와준 국가가 놀랍게도 지금은 극빈 국으로 전락한 에디오피아도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형 무기 영상물 등으로 전쟁의 참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영상으로 제작된 고지탈환 상황은 가슴을 졸이게 하였습니다.
1950년 3개월 만에 초토화된 서울의 참상은 너무나 처참하였습니다. 코를 틀어막고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는 미망인들, 폐허가 된 집터위에서 울부짖는 어린아이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 이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군 복무중인 병장이 된 아들이 있습니다. 꽃다운 청춘에 쓰러진 군인들이 아들과 오버랩 되면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쓰러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 왔습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느낌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는 잊혀져가는 천안함 사건이라는 제목 하에 아들의 묘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에 3년 전 아들을 잃고 오열하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적이 지척에서 위협하는데도 너무 태평합니다. 한국전쟁이후 60년 만에 놀랍게 발전된 한국의 문명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켜 놓은 듯 합니다 오히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가 불안해서 걱정들을 하는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니 뭔가 거꾸로 된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관람실 중간 지점에 이르러서 너무 가슴 아린 전선의 편지 한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님 전상서라는 서두로 시작 된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두 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귀속은 무서운 광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입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이 덤벼 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이!’ 하고 부르며 어머니 품에 털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제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의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길 실 것입니다.
어머님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게걸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벌컥 벌컥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1950년 8월 10일
아들 이우근
이글을 쓴 이우근 학도병은 다음날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휴전 중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할 때가 지금 이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