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얼굴, 롱 다리
< 전정식 장로, 남포교회 >
“외모를 중시하는 것은 우리사회의 풍조일 뿐 중요치 않아”
매주 목요일은 예약된 영유아의 건강상태와 성장, 발달을 점검하고 상담 하는 날입니다. 아침나절 일찍 12개월 된 여아를 데리고 엄마, 아빠가 찾아왔습니다.
여아의 건강상태는 좋았습니다. 그리고 벌써 혼자서 익숙하게 걷고, 또 단어도 엄마, 아빠 등 몇 개를 알고 구사하고 있습니다. 여아의 키는 80센티, 체중은 11킬로그램, 두위는 40센티로 키와 몸무게는 같은 또래의 평균치보다 꽤 높았으나 머리둘레는 평균치보다 약간 낮았습니다.
여아의 진찰 결과를 같이 들여다보며 상담할 때, 아기의 건강상태가 좋다는 이야기와 발달이 같은 또래에서 빠른 편이라고 설명할 때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다 아기의 키가 같은 또래 중에서 아주 크며 머리는 그에 비해 작다는 설명을 하니 엄마, 아빠의 표정이 환해지며 기뻐합니다.
아이들의 성장, 발달은 개인차가 커서 커가면서 달라질 수도 있으나 정상적으로 자라나는 경우 어렸을 때 키가 큰 아이가 커서도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진찰결과를 상담할 때, 아이들의 키가 같은 또래에서 큰 편에 속한다고 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거기다가 작은 얼굴을 연상시키는 낮은 두위 계측치를 보면 부모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의 양육에서조차 부모들이 신체의 외모를 중요시 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외모를 중요시하는 풍조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도 성형을 위해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연예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도 입시, 또는 취직 면접시험을 위해 성형외과를 찾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건강진찰을 할 때 아이의 건강상태, 기능발달 상황, 성장계측수치 중에서 외모로 이해할 수 있는 성장계측수치보다는 아이들의 기능발달 상황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소견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체 성장에 관한 평가에서 발달지체가 예상되는 아주 작은 아이들이나 과도비만이 염려되는 비정상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정상에 속하는 아이들이 보기 좋은 체형을 갖고 싶어 하는 데에는 솔직히 의학적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아이들의 큰 키, 작은 얼굴을 좋아하는 경향에 대해 무덤덤하며 어느 정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살면서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모와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판단의 근간이 됩니다. 왜냐하면 오래 동안 같이 지내보지 않고는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좋은 학벌, 경제력, 사회적 위치, 심지어 신체적 외모를 갖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리고는 좋은 외모를 갖춘 사람은 당연히 좋은 평판과 대접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큰 교회, 유명한 목사님이 있는 교회를 좋아하고 자랑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런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 큰 존경을 받습니다.
저는 우리 교단이 바른 신학을 지향하는 교단이라 자랑스럽고, 우리교회가 말씀이 좋고, 또 훌륭한 성도들이 많은 교회라 좋아합니다. 그런 교회에서 장로가 된 이후 제가 갖춘 외모의 영향인지 교회 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저를 알아보아, 조금은 어색할 때도 있지만 대접 받는 느낌을 받아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신약은 물론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고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또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도 세시는 분으로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별칭들 중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표현하신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생각해 보면(출 34:6 참조)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볼 필요도 없으시기도 하지만 도무지 우리의 외모에 관심이 없고 또 볼 의향이 없으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애쓰고 보람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서 얻는 칭찬과 대접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는 어리석음과 부끄러움의 자책이 듭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특히 교회 생활에서 누구의 뜻을 따르며 누구의 칭찬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가 저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