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관에 있어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성
< 박동근 목사, 강변교회 교육목사 >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구원을 추구한 유대교는 율법주의로 규정되어야”
E. P. 샌더스는 1세기 유대주의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규정하였다. 그의 언약적 율법주의란 은혜의 언약에 의해 언약 공동체 안에 들어간 자들이 율법을 순종하므로 공동체 안에 머무는 체계를 의미한다.
샌더스는 1세기 유대주의 문헌을 연구하고서 유대인들의 인간론이 죄에 있어 중립적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에는 원죄나 전적 타락 같은 것은 없다. 인간은 은혜와 죄성이라는 본성과 무관하게 죄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지을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죄는 그 순간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샌더스는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혹은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시작이 언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가 아닌 은혜의 종교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를 기독교와의 연속성 속에 넣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새로운 언약적 율법주의이다. 유대교와 같이, 기독교도 은혜로 공동체에 이동하여 순종으로 머무는 체계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샌더스는 유대교를 나름 잘 통찰했다고 여겨진다. 샌더스가 소개한 유대주의는 개혁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한 유대교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율법주의로 바울과 대립된 것으로 이해되는 유대교는 은혜로 시작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도 유대교가 은혜 자체를 부정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은 유대교를 결코 펠라기우스주의적으로 보지 않고 세미펠라기우스주의로 규정해 왔다. 그래서 바울이 반대한 유대주의나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을 세미펠라기우스주의자들로 보았고, 세미펠라기우스주의로서 로마 카톨릭을 이와 대비시켰다.
확실히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맞다. 그들은 은혜로 시작하지만 순종으로 머문다. 그러나 여기서 순종하는 인간은 은혜와 협력하지만 스스로의 중립적, 자율적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인간이며, 이러한 인간의 행위가 은혜와 함께 공로를 이루니 이들은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율법주의인 것도 확실하다.
정확히 통찰했음에도 불구하고 샌더스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왜 언약적 율법주의를 율법주의가 아닌 은혜의 종교로 규정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샌더스의 유대교 종교 체계의 해석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동일한 체계를 놓고 한편은 은혜의 종교로 규정하고 한편은 율법주의로 규정하는데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고 구원론에 큰 차이를 안은 채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헤르만 리델보스가 본 유대교도 샌더스와 다르지 않다. 그는 말한다. “이스라엘에게 특별 은총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은총을 주신 목적이 유효한 구원의 원인으로 이해되지 않고, 토라를 성취해 보상을 받게 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헤르만 리델보스, 하나님 나라, 287).
따라서 헤르만 리델보스는 특별은총이 있지만, 협력하여 이룬 순종을 공로로 여기며, 죄를 질적 의미가 아닌 수량적 의미로 이해해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구원을 추구한 유대교를 율법주의로 규정한다. 헤르만 리델보스에 따르면, 예수님의 구원 선포는 유대주의적 공적 사상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따라서 헤르만 리델보스를 따를 때, 이스라엘 안에 구약을 온전히 따른 백성들과 구약을 공로주의적으로 이해한 예수님의 대립자들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유대문헌에서 이런 율법주의자들의 사상적 흔적이 발견된다.
예수님의 사도로서 헌신한 바울과 유대교와의 논쟁은 예수님의 복음과의 연속성 속에서 율법주의에 관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새관점 학자들은 예수님과 바울이 늘 “민족적 우월감에서 나온 민족적, 종교적 배타성“에 도전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예수께서는 실제로 유대인의 민족적 배타성만을 지적하시지 않고, 유대 백성 안에 유대인 세리와 창녀를 자기 의에 비교하며 정죄한 유대인들도 공격하였다.
유대인들이 공격한 것은 이방인만이 아니라(민족적 배타성), 유대인으로서 도덕적 흠을 가진 세리와 창녀(도덕적 배타성)도 공격하였으며,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들의 교제의 식탁에 비수를 꽂았다.
민족적 배타성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종교개혁자들도 인식한 문제이며 설교의 자료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들은 민족적 배타성만이 아니라 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자기 의를 드러내며 다른 죄인들을 정죄한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사상의 문제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타락하여 공로화 된 유대교와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이해한 헤르만 리델보스의 이해가 합당하다.
물론 유대인들의 교리적 부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참된 신자가 존재했지만, 구약과 유대교를 구분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도 지적하고 싶다. 예수님과 바울의 복음은 유대교의 성취나 재해석이 아니라 구약의 성취로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