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총체적 회의주의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역할

0
36

총체적 회의주의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역할

 

< 김영규목사 >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국가의 임무는 보다 큰 도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

 

 

요즘 사람들은 생산물들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들과 새로운 창조적 아이디어 혹은 디자인을 소비한다고 할 만큼 시대상이 지식경제 사회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것의 간접적 영향으로 삶 자체가 놀이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를 지탱하는 과정에서 비우량 담보대출의 부실이나 투자기관들과 금융회사들의 투자상품 내용들에 대한 통제가 장기적으로 기본 생산 활동의 전체적 특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영향으로 인하여 주고받으며 속고 속이는 자본 시장의 규모가 여하튼 켜야 한다는 성장요구에는 크게 미치지 못함에 따라 체감 경기의 위축을 느끼고 국가의 전체적 경제 기능으로부터 나타난 허점들이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는 것 같다.

 

그러나 국가나 사회 및 교회는 세계가 과거의 어떤 시대보다 전혀 다른 장기적 위기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국가 정책이나 환경의 위기도 아니요 세계 경제나 지역적 경제위기도 아니다. 미래 에너지 위기나 전쟁 등과 같은 재난의 위기도 전혀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살 희망이 없는 근본적 위기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것을 찾고 추구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과거에는 그 근원을 찾는 인간의 행위나 욕구의 대상에서 쉽게 변하는 지각세계는 경쟁에서 밀려났었다. 지금은 감각세계 자체가 물질세계가 아닌 심오한 세계의 실체라는 사실이 저절로 발견이 되면서 인간의 탐구활동에 있어서 절망과 풀 수 없는 근원적 벽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미래 사회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위기의 근원적 내용이다. 거의 절망적 내용이다. 과거에 회의주의는 어떤 것에 대한 회의주의이고 어떤 사람들에게서 찾게 되는 회의주의였다.

 

그러나 지금의 회의주의는 총체적 그리고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는 회의주의이다. 우주 질서의 마지막 꽃이 바로 물질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와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인류가 발견한 마지막 절망의 내용이다.

 

더구나 지금은 물질세계의 창조에 있어서 대략 10의 43승 분의 1초의 마지막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이 힉스와 같은 어떤 입자들이 정보단위로 있는 빈 공간에 대한 발견으로 끝나게 됨으로, 물질세계에 대해서 풀 수 있는 모든 입자들이 거기에서 생산이 되는 벽만을 발견했을 뿐 그 넘어 어떤 정보의 세계가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수단들이 없는 근본적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게 지금 우주 질서의 비밀을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는 과학의 종말에 도달한 것이 총체적 회의주의를 가속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회의주의란 없다. 우리가 19세기 이전에는 물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었지만, 20세기에 와서는 공기 중에 산소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었고, 21세기에 와서는 지금 우주의 질서들이 드러나기 전에 그런 힉스 공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을 뿐이다.

 

좀 더 고급한 감사기도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진화론자들은 그런 힉스 공간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필요가 없지만, 하늘에서 정한대로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힉스 공간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게 하신 모든 질서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은 상급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닮아 가는 은택들을 받는 것을 마지막 최고의 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받은 기업이나 일자리도 그들의 분깃이 아니요 몸의 부활이나 하나님의 나라도 진정한 그들의 분깃이 아니다. 그들의 보상은 그런 모든 것들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이 가장 큰 보상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다른 종교란 없다. 기독교는 종교운동도 아니고 세속운동도 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그런 하나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저항할 뿐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사람들을 사랑할 뿐이요 있는 것을 가지고 줄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이 없는 그 자체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그렇게 의존하여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인류 안의 초기 교회인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부름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웃을 위해서 세금을 내야 했고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위해서 세금을 내야 했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주는 왕 제도가 도입된 이후 그들은 왕을 위해서 인두세, 물품 거래세, 소득세, 취득세, 통행세 등 각종 세금들을 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용병제도처럼 도입된 왕 제도가 국가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제도의 발전과 함께 정부도 큰 비영리단체처럼 기능하는 작은 정부의 개념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 정부가 국민의 의무들에 의해서 지원을 받는 것을 이용하여 잠정적으로 위임된 그 권력을 휘두르고 법을 이용하여 철 밥통이 되면 당연히 국민의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국민을 위한다고 국민의 의무인 세금을 국민의 합의 없이 마음대로 정하여 국민들에게 실제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없이 착취만을 일삼으면, 그것은 정권을 잡은 다수인들이 국민에 대해서 무서운 도둑질과 강도짓을 하는 것이다. 큰 도둑질은 자기 안에 숨기고 작은 도둑을 잡으면서 뻔뻔스럽게 일하였다고 하는 꼴이 된다. 국가의 청지기들은 그런 큰 도둑질을 가능한 적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회의주의가 극도에 도달한 미래 사회에 있어서 삶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흔들리어 한 순간에도 살 희망이 없는 미래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교회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초대하여 영혼들에 대해서 사기를 치지 않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위로하는 일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그 권력을 잡은 자들도 자체나 다른 이들로 하여금 큰 도둑질을 가능한 적게 하여 선한 약자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