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방지법안’ 부결에 대한 유감
< 강경민 목사, 총회 부서기, 일산은혜교회 >
지난 98회 총회는 경기북노회가 헌의한 ‘세습방지방안’에 대한 헌의안을 부결시켰으며 기독교개혁신보는 654호 사설에서 ‘소위<세습방지 법안>에 대한 이해’라는 제목으로 세습방지 법안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이 문제에 대한 우리 교단의 공적 입장은 정돈된 것 같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 필자는 깊은 우려를 갖는다.
지난 수 년 동안 담임목사 세습방지법안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핵심적 관심사였다. 작년에는 감리교가 금년에는 장로교단 중 가장 규모가 큰 통합측과 합동측이 담임목사세습방지법을 통과시켰다.
고신교단에서는 동 헌의안에 관해 1년 동안 연구키로 했고 성결교단은 내년 봄 총회에 동 헌의안이 상정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이 문제가 얼마나 뜨거운 관심사인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많은 기독교 단체에서 이 문제에 관해 여러 차례 학술세미나가 열렸고 수많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신학적 관점, 목회적 관점, 사회적 관점에서 소위 담임목사세습은 성경적 정신으로 옳지 않다는 일치(consensus)가 이루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교단 총회는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신학적 연구와 세미나 한 번 개최해 보지 않고 쉽게 결론을 내려 버렸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결과가 왔을까? 첫째는 이 문제에 대한 폭넓은 공론의 장 없이 헌의안이 상정됨으로 인해 총대 상호간 소통의 부족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이 법안 발의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필자의 부족함을 깊이 반성한다.
둘째 우리교단의 사회적 소통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결과였다.
기독교개혁신문 사설은 이 법안의 정신을 “교회법의 정신이 아닌 세속적 판단의 가치관이 작용한 것에 불과한 따름”이라고 결론지었다.
과연 그럴까? 두 가지만 묻고 싶다. 하나는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은 세속화이지만 세상의 관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세상과의 소통능력이지 않은가? 소통 능력 없이 복음의 정신으로 세상을 설득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소통을 위한 노력은 탁월한 복음증거자 바울이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 헬라인처럼 되겠다는 정신과 일치한다. 그런가 하면 <세속적 판단의 가치관>이란 말을 무슨 맥락에서 사용했는지 더 알아보아야 하겠지만 교회가 속해 있는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 자체를 모두 세속화로 규정한다면 칼빈이 주장한 일반은총 영역에서의 공동선이란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사회에서 회자된 선(善)개념을 모두 악(惡)의 열매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 칼빈주의 관점에서 옳은 것인지 신학적인 해답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담임목사직 세습방지문제는 이처럼 쉽게 종결된 문제는 아니다. 교단입장에서 신학자와 목회자 그리고 장로(평신도)들이 참여하는 몇 차례의 학술세미나를 통해 교단의 중지를 모아가야 할 중요 과제이다.
필자는 그동안 제시된 두 가지 문제만을 약술하려 한다.
첫째, 담임목사세습문제에서 발생하는 가장 심각하고 진실한 신학적 질문은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너무나 정답이 뚜렷하기 때문에 흔히 간과해 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논의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300명 미만의 작은 교회들은 세습문제가 아예 이슈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중대형 교회의 경우 담임목사의 직위는 사회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엄청난 기득권을 향유하게 되는데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크게 공헌한 담임목사(혹은 장로)의 직계 가족이 그 자리를 이어 받는다면 어찌 그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카톨릭에는 교황이 한 사람인데 개신교는 수 십 명의 교황이 있다는 비판은 회자된 지 오래이다. 이 문제는 대형교회 출현이후 개신교가 교회분열에 대해 원죄처럼 짊어지고 갈 숙제이다.
둘째, 개혁신보 사설이 주장한 것처럼 절차의 공정성만 지켜지면 문제가 없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담임목사(또는 담임목사에 버금가는 장로)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어찌 그 과정의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나아가서 우리 사회가 그런 형식적 공공성을 인정할 것인가?
성경은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정죄한다. 법과 제도는 인간의 악을 억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허심탄회 한 대화가 절실함을 간곡한 마음으로 제안하고 싶다.
‘세습방지법’이란 용어는 소통을 위한 언어일 뿐 본질이 아니다.
<이 원고는 본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