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신학을 겸손하게
< 나경수 목사, 대림교회, 남서울노회장 >
“여럿이 같이 할 때 바른 신학 가능성 더 많아져”
우리는 바른 신학을 추구하는 교단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교단에 속하여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또 한편으로는 바른 신학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음에 떠오른다.
누가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 바른 신학을 원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을까? 지상에서 바른 신학을 가지는 것이 가능한가? 바른 신학은 무엇인가? 물론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우리가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직 성경”
개혁주의자들은 몇 개의 표어들을 가지고 있다. 이 표어들은 그들의 정신과 관심을 보여준다. 첫 번째의 표어가 “오직 성경”이다. 여기서 성경은 번역된 성경이 아니라 최초로 기록된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말한다. 그들은 심지어 번역된 성경은 오류가 들어있을 가능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이 오직 이 성경만이 무오하다고 생각한 “오직 성경”은 성경 외에 어떤 신학도 완전히 바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은 모든 성도들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순종할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우리에게 좋은 신학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어느 누구도 성경을 무오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The 와 A”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학이나 주장에 “the”를 붙일 수가 있을까? “The”를0 붙인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주장일 것이다. 어떤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이런 일화가 있었다. 어떤 분이 자신의 학위논문 제목에 “the”를 붙인 논문을 제출하였다. 심사위원회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어떤 심사위원은 심지어 “당신은 하나님인가”라고까지 하면서 책망하였다고 한다.
이런 소동이 개혁주의 “오직 성경으로” 표어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오직 성경만이 항상 “The”일 것이다. 성경에 근거한다고 해도 우리의 주장이나 신학은 항상 “A”일 것이다. 이것이 “오직 성경”의 개혁주의 정신일 것이다. 우리의 성경해석은 항상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로교회와 양심의 자유”
개혁주의의 “오직 성경”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의 바른 신학은 어떤 고정된 내용이 아니라 성경에 더욱 일치하기 위한 우리의 정신이요, 우리의 신학의 과정일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감독교회보다 장로교회가 좋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뜻과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에 감독교회는 목사 홀로 한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목사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성도, 특히 장로들과 같이 한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전통의 도움은 말할 것도 없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 여럿이 같이 하는 것이 더욱 바른 신학을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장로교회정치 제1장 원리 제1조에 있는 “양심의 자유”가 아닐까?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개혁주의의 정신은 꽃을 피우지 못 할 것이다.
어떤 사회학자가 오늘의 북미와 남미의 차이를 만든 원인이 이 자유가 있는 개혁주의 신학과 자유가 없는 천주교의 신학에 있다고 하였다. 더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남미에는 천주교, 북미는 늦게 개혁주의 교회가 들어간 결과로 본 것이다. 자유가 없는 교회, 신학교, 교단은 개혁주의의 정신을 가진 공동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바른신학은 교단의 정신”
우리는 바른 신학을 추구한다. 자신의 바른 신학을 가지고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여 더욱 바른 신학으로 나아가고 있다(고전 13:12). 이 소망을 가지고 성경에 근거하여 다른 분의 바른 신학을 존중하면서 성경에 근거한 자신의 바른 신학을 항상 겸손하게 주장하는 우리 교회, 노회, 총회 곧 우리 교단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