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는가?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찬송이라는 것은 지각
을 가진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어떤 찬송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합당한가 하는 것이다.
대략 한 세대 전쯤부터 청년들의 집회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찬송가 책 밖
의 노래들이 대중음악의 보급이라는 시류의 힘을 받으면서 강하게 전파되더
니 급기야는 예배에까지 도입되어 지금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입을
맞추고 있다.
한편, 최근 21세기 찬송가가 출판권 때문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여간 많이
낸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아직도 여러 방면에서 적지 않은 비판의 소리를 듣
고는 있는 가운데 교계에서 점점 널리 사용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예배에 합당한 찬송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더욱 절실한 것
처럼 보인다.
모름지기 개혁교회(장로교회)는 전통적으로 시편찬송을 고집해왔다. 개혁교
회가 시편찬송에 집착하는 데는 이유
가 없지 않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아
무도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받은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 하나님께 진정
한 영광을 돌리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이것을 힘주어 밝힌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바이
다. 그것은 그의 계시하신 의지, 곧 성경 말씀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
로 인간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단의 지시를 따라서 어떤 보이는 형상을 예
배의 대상으로 삼아도 안 되고, 기타 비성경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안 된다”
(21장 1항, 박윤선 역).
하나님을 예배하는 찬송을 위해 이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바로 시편이
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히스기야 왕도 여호와의 시(대하 29:27), 곧 다윗과
아삽의 시편(대하 29:30)으로 하나님을 찬송했고,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도
시편을 노래했던 것이다(엡 5:19; 골 3:16). 이런 점에서 역사적인 개혁교회
는 예배에서 시편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야 마땅하다.
때때로 찬송가와 신앙격려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예배에서조차 찬
송가가 아니라 신앙격려가를 버젓이 부르는
잘못을 저지른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는 찬송이고,
성도의 신앙을 세우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는 신앙격려가이다. 일반적인 신앙
집회에서는 신앙격려가를 부를 수 있으나 예배에서는 반드시 찬송가를 불러
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강요에서 찬송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칼빈의 말
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
사의 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
로 이렇게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
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
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기독교강요 3권 20장 32절).
어떤 이들은 예배에서 시편찬송을 사용하고 싶으나 구할 수가 없다고 말한
다. 그러나 이것은 가당치 않은 말이다. 우리나라에 이미 여러 종류의 시편
찬송이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번역되어 시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스코틀랜드나 미국에서 출판된 시편찬송들이다. 최
근에는 고맙게도 제네바 시편찬송이 출판되어 교계에 보급되고 있다.
개혁교회의 목회자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와 같은 시편찬송은 얼
마든지 입수하여 예배에서 사용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학적으
로 볼 때 국적이 불분명한 노래들을 예배에서 마구잡이로 부르는 것은 칼빈
의 말처럼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개혁교회는 예배에서 시편찬송을 불러야 한다. 그러나 찬송에도 발전이 있다
는 것을 감안할 때 제네바 시편찬송을 비롯해서 역사적으로 출판된 여러 시
편찬송들을 함께 사용하면서 우리 시대에 맞는 곡조의 시편찬송을 창안하여
예배에서 더 많은 시편찬송으로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