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섬기며| 별과 같은 윤순옥 권사님을 추억하며 _ 권창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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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섬기며

 

별과 같은 윤순옥 권사님을 추억하며

 

<권창기 목사 _ 초대교회>

 

은혜가 충만한 아름다운 장례식에서 흐르던 눈물

 

강원도 정선의 유천교회 윤순옥 권사님은 30년 전 필자가 그곳에 부임했을 때 세움 받은 첫 번째 권사님이다. 참으로 쉽게 만나보기 힘든 그분이 최근에 소천하셨다. 필자의 후임이신 현 담임 최용철 목사님에 따르면 권사님은 90의 연세로 천국에 가셨지만 숨지기 전 잠시 건강이 돌아왔을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전도할 기회를 주시려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나 보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생전에 당신의 아들보다 어린 최용철 목사님에게 늘 허리 숙여 공손히 예를 표하며 최 목사님이 20년째 목회를 하는 동안에도 단 한 번도 불만이나 불평을 토하지 않고 순종의 삶을 사셨다고 한다. 간혹 도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구석진 조그만 시골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권사님의 기도 소리를 듣고 다들 자신을 돌아보며, 어떻게 산골 교회 할머니가 저리도 유창하게 그리고 신학적으로 분명한 기도를 할 수 있는지 의아해 했다고 한다.

폐가 나빠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마지막 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해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숨질 때에 마치 예수님이 그러신 것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천국으로 가셨다고 한다. 그분은 별과 같은 분이셨다.

30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내가 합신 9회 졸업을 앞둔 31세의 나이에 보냄 받은 첫 목회지가 바로 그 폐광촌 동네 유천교회였다. 당시는 믿음의 씨를 파종하기에는 너무도 황량한 곳이라 목회 초년병으로서는 적응하기가 참 힘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는 곳이다. 지금도 간혹 방문하면 최 목사님과 교우들이 지극 정성과 사랑으로 맞이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당시 목회의 현장이 너무 힘들어 아직도 단편적이지만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 동네 분들은 새로 이사 온 젊은 전도사를 불편하게 여겨 심지어 물도 나누어 주지 않아 강가에 가서 물을 길러 먹었을 정도였다.

요즘은 아우라지 하면 레일바이크를 비롯한 나름의 관광지로 많이들 알려진 곳이지만 당시에는 사람이 살기에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곳이다. 내가 목회 대상으로 삼은 곳은 교회를 중심으로 3개의 중요 동네였는데 그 동네 이름이 갈금, 송천, 싸리골이었다. 그런데 당시엔 “ ~ 못한다 말하지 마라” 라는 마을들의 분위기를 풍자한 우스개 풍문이 있었다. “갈금에서 노래 못한다고 말하지 말고, 송천에서 말 못한다고 말하지 말고, 싸리골에서 술 못 먹는다 말하지 마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 말 잘하는 송천 동네 한 복판에 들어섰으니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상상에 맞기고 싶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때엔 여러모로 단합이 참 힘든 마을이었다.

이런 시기에 젊은 전도사인 나는 교회를 개척하며 하도 안타까워서 당시 면소재지의 교회에 출석하시는 분들에게 도전을 했다. 마을의 분열된 상황을 보며 이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지역 교회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야 되지 않겠느냐고 호소한 것이다. 그때 유일하게 그 도전에 반응을 하신 분이 윤순옥 권사님이다. 당시 면소재지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의 피택 권사의 직분을 두고 남편까지 전도하여 자신의 동네에 젊은 전도사가 개척한 유천교회로 옮겨 출석하신 것이다. 물론 윤 권사님이 섬기시던 그 큰 교회에서의 사명도 있었으며 그 교회 목사님이나 성도들도 오해할 법하고 아쉬움이 많았을 텐데 윤 권사님이 교회를 옮기도록 끝내 이해해 주신 것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쨌든 동네의 화목과 영적인 문제가 시급하다고 느끼신 윤 권사님의 결단을 통해 한 교회의 역사가 새로이 펼쳐지게 되었다.

당시 윤 권사님은 어린 전도사가 새벽잠에 취해 있으면 그 캄캄한 새벽길을 논물에 빠지고 넘어지면서도 홀로 나와 새벽을 깨우며 소리 높여 기도하셨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농사지어 슬하의 8남매를 훌륭히 길러 내신 분이다.

윤 권사님은 그 옛날 험한 세월 속에서 안타깝게도 한글을 배우지 못해 글을 읽지는 못하지만 신기하게도 성경만은 정선아리랑의 곡을 타고서 줄줄 읽어 내는 분이셨다. 목회 초년병이요 풋내기 전도사였던 나는 그때 윤 권사님을 통해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뛰어 넘어 역사하시는 분이란 사실이다.

당시는 먹을 것이 참 귀했고 교회를 박해하는 동네 주민들과 무속인들이 동서남북으로 교회를 포위하듯 진을 치고 있을 때라 참 외롭기도 많이 외로웠던 때였다. 윤 권사님은 도시에 사는 자녀들이 고향에 남아 계시는 부모님들 위해 좋은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그 귀한 것을 양은도시락 한 가득 싸오셔서 섬겨 주셨던 그런 분이다.

윤순옥 권사님의 장례식장은 그야말로 은혜가 충만한 현장이었다. 어쩌면 90의 연세에 돌아가셨으니 세상 말로 ‘호상’이라 그냥 형식적인 예배나 의식이 진행될 듯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장례식은 현 유천교회 담임이신 최용철 목사님의 성령 충만한 말씀 선포를 통해 가능했다. 장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옛 목사의 머릿속에는 사반세기 전의 가물가물해져 가는 윤순옥 권사님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두 눈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최 목사님도 장례 예배를 마치고 눈물을 왈칵 쏟아 내는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교인의 임종 시에 유가족들이 눈물을 보이면 주변에서 “천국 가셨는데 왜 우느냐”고 책망을 하기도 하는 것이 기독교 장례식이다. 그런데 오히려 권사님을 담임했던 전 현직 목사들이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권사님의 임종을 아쉬워하는 그런 장례 예식의 현장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나는 현재 담임하고 있는 우리 초대교회를 생각했다. 우리 교회에서 후일에 혹시라도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가시는 교우가 있다고 치자. 그분의 장례식에 이미 은퇴했을 옛 담임 목사인 내가 제일 먼저 달려와서 그분의 먼저 떠나감을 슬퍼하며 굵은 눈물을 뿌리게 하는, 별과 같은 믿음의 성도들이 많이 나온다면 얼마나 복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