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섬기며
어느 작은 교회 목사 이야기
<최상규 목사 _ 몸된교회 | 본보 객원기자>
주일 예배를 앞두고 갑자기 목사님이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다면 교회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사랑하는 동역자 찬양의 교회 염성섭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소식을 듣고 이대목동병원 중환자실로 찾아갔을 때, 사모님이 당시 상황을 들려주었다. 2018년 마지막 주일 예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목사님이 가슴에 심한 통증을 호소했고, 교우들은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이송했다. 심폐소생술을 해서 가까스로 호흡은 돌아왔지만, 우리가 갔을 때까지 의식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염 목사님은 사십 대 늦은 나이에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목사로 안수 받은 후 교회를 개척했고, 성악을 전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사역에 집중했다. 성도가 30여 명쯤 되고 교회 공동체가 세워져 갈 때 즈음 문제가 생겼다. 평소 당뇨로 고생하던 목사님에게 합병증이 생겼다. 다리로 내려가는 혈관이 막혀 걷기가 힘들어졌고 휠체어에 의존해서 일 년 넘게 지내야 했다. 한쪽 눈은 실명했고 심장과 신장 기능까지 많이 약해졌다. 일 년 정도는 예배 인도조차 할 수 없었다. 많은 성도가 교회를 떠났고, 돌아와 보니 다시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염 목사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의욕을 다지고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앞두고 다시 쓰러졌다.
“큰딸이 힘이 된다면서요.” 함께 갔던 목사님 한 분이 물었다. “이 아이 없으면 개척교회 못하죠.” 사모님이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큰딸은 봉사뿐 아니라, 십일조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헌금함으로 부모님의 교회 사역을 힘써 돕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서 좋고 나쁨을 판단한다. 세상의 잣대로 목사님의 삶을 보자니 그야말로 쓸모없는 인생이었다. 돌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요? 하나님, 어쩌라고요?”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에 대하여
평소 알고 지내던 청년이 교회로 찾아왔다. 오지랖 넓은 이 친구는 여전히 돈과는 상관없는 일로 바쁘게 살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편집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돈을 생각하며 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찾는 사람들도 경제적 여유가 없어 부탁한 것이기에 늘 적은 수입으로 근근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삼 십 대 후반이 되었는데 아직 결혼 전이고 부모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쓸모없는 인생이었다.
대화하다 위로랍시고 이렇게 말했다. “형제의 쓸모없음이 누군가에게는 쓸모 있음이 되겠네.” 경제적으로 쓸모없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고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해서이다. 반면 그 일로 섬김을 받은 사람은 대가를 적게 주고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이니 어쩌면 ‘거저 받은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어떤 이의 쓸모없음은 다른 이에게 쓸모있음이 되는 것이다.
물론 강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착취이다. 하지만 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하고, 혜택을 받는 사람이 값을 치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처지일 때, 이는 은혜의 행위가 아니겠는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진 호의인 것이다. 이 청년의 쓸모없음이 다른 누군가에게 은혜가 되기에, 그의 삶은 쓸모 있음이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 이렇게 사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작은 교회 목회자로 사는 것, 나름 신실하게 살아도 결과로 보여줄 것이 없는 삶은 세상의 잣대로 미련하고 부끄러운 것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의 나라의 눈으로 보면 누군가를 부요하게 하는 은혜로운 삶이요 주님의 제자로서 영광스러운 삶이다.
한 셈 치고
광주의 어머니라 불리던 여성 운동가 조아라 선생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대농가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품삯 일을 하는 사람도 가족같이 대하고 성경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말씀대로 살고자 했던 분이었다.
선생은 아버지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아버지의 삶은 문자 그대로라고는 아닐지 몰라도 말씀을 몸으로 사시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 나는 교회가 있는 동리에 굶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고 나무가 없어 불을 때지 못하는 집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우리 집 쌀독과 나무 낟가리를 열어두었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기념문집 308쪽)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는 한 형제이다. 우리는 동리에 굶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는가? 우리 이웃의 교회가, 우리 이웃의 목회자와 그 가족이 굶는 사람이 있는지, 나무가 없이 불을 때지 못하고 있는지 살피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사역자에게는 혼자가 아니라는 응원과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옳다는 지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선교사들을 보면서 힘들게 오지에서 사역하면 신실한 종이라 말하면서도, 국내 목회자가 힘겹게 어려운 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면 무능하다고 한다. 부끄러운 이중성이다. 형제의 아픔을 보고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마음일 것이다.
예전에 “한 셈 치고”라고 불리던 운동이 있었다. “OO 한 셈 치고” 그 돈을 기부하는 운동이다. “커피 한 잔 먹은 셈 치고, 택시 한 번 탄 셈 치고, 영화 한 번 본 셈 치고, 외식 한 번 한 셈 치고” 우리가 형제인 염 목사님과 찬양의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 한 셈 치고” 얼마라도 기부하면 어떨까? 이를 통해 염 목사님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응원을 보내면 어떨까? 지금처럼 주님을 좇아가는 삶이 옳다고 지지해 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