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개인과 전체를 생각하며

0
81

사설

개인과 전체를 생각하며

 

전 세계적으로 개인주의가 편만하다. 욜로족, 딩크족, 워라밸 등의 신조어에 얽힌 당대의 사회 현상도 개인주의의 변용이라 할 수 있다. 개인주의의 극대화는 국가관이나 인생관을 바꾼다. 평창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구성했을 때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선수 개개인에 결코 손해가 없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이는 1970-80년대에는 생각할 수 없던 예민한 반응이다. 그 시절엔 국가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는 단선적 개념이 우세했다.

평창 올림픽 때의 단일팀 사안은 두 가지 의미를 보인다. 첫째, 아무리 좋은 명분과 집단적 가치를 지닌 일이라도 개인의 동의 없이 일방 추진되면 갈등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사회가 대의명분을 위해 개개인의 자유나 소망의 유보 혹은 양보를 용납하지 않을 만큼 개인주의적 조류 속에 있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일찍이 사회적 평등이 확산되고 개인주의가 발전하면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예견했다. “비록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만큼 부나 권력을 지니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의 욕구를 보살피기에 충분한 부와 이해력을 지니게 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고립된 존재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운명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상상한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현대에 자유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이제 전체로서 무엇인가 목표 지향적 요구를 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집단주의의 횡포로까지 치부된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괴물)이 되는 역설은 특히 19세기말부터 지금까지의 세계사가 증언한다. 전체주의가 판옵티콘 같은 사회의 폐쇄성과 맞물릴 때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은 상실될 수밖에 없다. 군사독재 치하나 사회주의권의 인권을 거론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의 우려 때문이다. 전체주의(파시즘)는 초법적 무제한의 권력의 가동을 정당화한다. 또 많은 경우 일인 주권자나 일당(一黨)에 모든 것을 일임하고 그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마치 모든 난국을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그 결과 독일 국민은 두 번이나 세계대전의 주범이 되고 극단적인 희생과 수렁에 빠졌다.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인권을 말살하고 탄압하는 것은 그 국가의 형성원인 국민의 파멸을 부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국가가 없다면 개개인의 자유와 복지는 어떻게 보장 받는가? 국가는 주권자인 개인들이 안전과 권리를 보장 받고자 사회적 합의를 통해 탄생시킨 계약적 제도이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보호와 안전을 위해 발전한다. 그러므로 국가가 국민을 탄압하고 불법을 강요한다면 계약 파기이며 합의 위반이라 정권의 탄핵과 소환도 가능하지만, 국민 또한 개개인이 국가의 유익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 그것은 일정 부분 전체를 위해 개인의 이익과 자유를 유보 또는 양보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과 전체(사회, 국가)의 진정한 관계는 유기적이며 상호 보완적이다.

이에 대해 존 롤스는 1)개인은 사회를 통해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 2)사회는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1)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집단주의자가 되며, 2)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유지상주의자가 된다. 롤스는 자유의 우선성을 통해 일단 2)를 인정하고, 그 후 차등적으로 1)을 인정한다. 즉, 절충주의적이다. 오늘날 그의 입장은 자유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 적합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전체에 대하여 개인으로서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우리는 절충주의에서 힌트를 얻어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먼저 추구하되 보편적 공익적인 목표를 위한 국가나 사회의 정당한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 그래야 질서가 안정되고 개인 또한 보다 더 풍부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대의를 위해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유보할 것은 유보하는, 자유의 자발적 절제라는 덕목을 솔선수범 실천해야 한다.

무엇이 정당한 요구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민은 기독교윤리학적 성찰과 연구가 지속적으로 수반돼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에 반하지 않고 보편적 상식에 입각하여 법적 타당성을 갖고 국민에게 요구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비록 개인적 납득의 편차가 있더라도 일단 복종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지만 한 국가의 형성원으로서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초법적이고 부당한 요구와 억압에 대해서는 데이빗 소로나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시민불복종’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바울의 교훈대로 개개인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위해 기도하며 성실히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교회 영역에서 첨언하자면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우리 개인은 그 속한 교회에 책임을 다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각 교회는 속한 노회의 유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각 노회는 총회를 위해 섬기고 도울 일이 없는지 생각하고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역으로 총회는 노회를 위하고 노회는 교회를 위하며 교회는 각 신자들을 위한다. 이는 위계나 종속이 아닌 보완적 관계라는 뜻이다. 진정한 자유란 서로 섬기기 위함이요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세로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개개인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유기적이고 유익한 관계를 도모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