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편지| 열차 여행 _ 박부민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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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편지

열차 여행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실로 오랜만에 저속 열차를 타고 고향길에 올랐다. 어린 날을 온통 사로잡았던 거대한 증기기관차가 뿜어 내던 꽃구름 같은 연기가 다시 밀려왔다. 끝없이 하늘로 합류하던 그 꿈들. 차창에 내다보이는 들판과 강물과 먼 산의 얼굴들.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의 정겨움. 터널을 지날 때 문득 창문에 비치는 내 모습. 나는 어디만큼 흐르고 있는 것일까. 열차 여행은 반추와 향수로 시간을 물들인다.

오래전, 갓 스물이 되던 겨울. 불현듯 홀로 카메라를 빌려 메고 춘천행 열차에 올랐었다. 창마다 한 컷씩 점멸하는 아늑한 동화 속, 눈발이 내려 천지를 잠재운 설경에 셔터를 눌러 댔다. 그러다 고즈넉한 청보라 빛 강마을을 발견하고는 어딘지도 모른 채 그 낯선 역에 훌쩍 내렸다. 마른 풀들이 희끗희끗 미소 짓는 포근한 강나루. 언젠가는 다가올 해맑은 미래를 그리며 시린 나무의 옆구리에 기대어 내 청춘은 오래 펄럭이고 있었다. 속 깊은 기도와 함께 흐르던 뜻 모를 눈물은 애써 돌서덜에 묻어 두었었나 보다. 그렇게 처음 탄 춘천행 열차는 나를 춘천까지 데려다 주진 않았지만 영혼의 건넌방에 눈부신 액자로 오롯이 걸려 있다.

그 후 또 스무 해가 한참 더 흐르고 나서도 하늘의 입김 가득 찬 강물을 따라 눈꽃 터널을 숨막히게 지나가던 그 열차를 다시 꿈꾸곤 했다. 잠포록한 사진 몇 장 속에 꼼지락대는 강변의 어설픈 발자국들과 여전히 덜컹거리며 기적 소리를 울려 대는 뜨겁고 서늘한 불빛이 지금도 쟁쟁하다.

고속화, 전철화로 추억의 그 느린 열차들은 이미 운행 중단되었다. 불가피하다지만 세상살이가 경제 논리로만 돌아가는 삭막한 시대가 된 것 같아 착잡하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고 전환점이 되어 주던 작은 시골역, 간이역의 그 향수를 각박한 이 현실은 감안해 주지 않는다.

작가 이효석은 유명한 ‘낙엽을 태우며’라는 수필에서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에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하였다. 거창한 생활을 꿈꾸며 큰 것을 추구하고 고속으로만 질주하는 이즈음 작은 것에도 마음 주며 좀 천천히 생각하며 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지만 열차 여행을 통해 어린 날, 젊은 날의 아름답고 소박한 꿈을 떠올리며 따뜻한 감성을 다시 누려 본 것은 모처럼 큰 복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