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 총회 400주년 기념 세미나_ 강의(1)| 도르트신조의 형성과 그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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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 총회 400주년 기념 세미나_강의(1)

도르트신조의 형성과 그 역사적 의미

<이종전 교수_대신총회신학연구원|역사신학>

 

* 지난 7월 10일 합신, 대신(수호) 교단 교류추진위원회 공동 주최로 열린 연합 세미나 강의 논문을 편집상 부분 발췌하여 소개함에 필자와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 편집자 주

 

도르트신조는 새로운 교리 제시가 아니라 오히려 항론파에서 제기한 문제에 답변한 정통신앙의 확인이었다

도르트총회는 신조는 물론 성경번역, 신앙문답 설교와 교육, 이교도 자녀 세례, 목사후보생 준비 교육, 출판물 검열 등을 결정했다

도르트신조는 역사적 정통신앙의 재확인이며 이를 계승하는 교회는 그에 대한 이해와 고백이 필수이다

III. 도르트신조의 성립

  1. 도르트총회가 있기까지

  아르미니우스가 별세한 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항의문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 그리고 각 입장을 지지하는 정치인들과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총회를 소집했고, 1618년 11월 13일에 시작해서 1619년 4월 23일 도르트신조를 채택한 후 5월 6일 도르트신조를 낭독하고 29일에 폐회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은 네덜란드 독립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정치적인 대립과 맞물려서 양진영으로 입장을 달리했다. 항론파는 중앙정부차원이 아닌 주정부 중심의 해결을 원했지만 반항론파는 중앙정부 차원의 국가적 해결을 요구했다. 이것은 바른 신앙고백을 통해서 개혁된 교회의 바른 모습을 기대하기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입장의 차이가 분명했다.

  온건파 입장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이끌면서 마우리츠가 이끄는 강경파가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주도권을 잡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올덴바르네벨트는 종교적인 논쟁을 원하지 않았다. 또한 더 이상 논쟁을 금하고(1610), 모든 홀란드 주민들의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결정을 하도록 유도했다(1614). 반면에 그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강경파의 마우리츠는 “1617년 개혁파교회를 보호하고 바른 신앙을 지킬 자신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하면서 신학적인 논쟁을 해결함으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며, 독립국가로서 중앙정부의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칼빈주의 진영을 지지하면서 전국적인 회를 소집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마우리츠는 1617년 6월 칼빈주의 진영의 사람들과 헤이그의 크로스터교회(de Klooster Kerken)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결의를 다졌는데, 이 집회를 일컬어 “애통하는 교회”(de doleerende kerken)라고 한다. 헤이그의 애통하는 교회에 모인 칼빈주의자들이 1200명이었으니 칼빈주의의 입장이 결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올덴바르네벨트는 마우리츠에 맞서서 먼저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했다. 즉 “가혹한 결의”(Sharp Resolution)를 천명했는데, 1617년 8월 4일 올덴바르네벨트의 지도로 “홀란드주의회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고, 그 군대의 사령관은 주재하는 시당국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마우리츠의 권위와 지위를 부정하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마우리츠는 네덜란드 독립에 있어서 결정적인 공로자인 빌렘(Willem van Oranje)의 아들로서 올덴바르네벨트에 대항할 수 있는 강경파의 수장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네덜란드 독립의 지도자로서 위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마우리츠는 연방의회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총독은 실제로 육해군의 최고 사령관직을 동시에 수행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각 주의 문제를 조정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덴바르네벨트의 ‘가혹한 결의’사건은 마우리츠로 하여금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마우리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국교회총회를 소집하는 것을 지지했고, 올덴바르네벨트는 이 회의 소집을 막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결과는 마우리츠가 지지하는 쪽으로 결착되었다. 즉 1617년 11월 11일에 모인 연방의회는 전국교회총회를 소집할 것을 4:3으로 가결했고, 개최일은 1618년 11월 1일로 정했다. 이렇게 결정되는 순간 아르미니우스 진영의 입장에서 반대했던 주(홀란드, 유트레흐트, 오버에이셀)의 대표들은 강력히 반발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 중에도 홀란드주의 대표는 강경하게 의회의 결의를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연방의회에서 중요한 사항은 만장일치로 결의해야 하는데 4:3으로 가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마우리츠는 홀란드 주에 군사적인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서 올덴바르네벨트는 이미 준비하고 있던 군대를 동원해서 마우리츠와 싸우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위협으로 응수했다. 결국 내전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고, 그 상황에서 마우리츠가 결정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국면이 만들어졌다. 즉 올덴바르네벨트와 홀란드주가 독주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 다른 주의 대표들이 다수인 연방의회의 지지를 받으면서 1618년 8월 29일에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올덴바르네벨트와 프로티우스 등, 아르미니우스 진영의 지도자들을 체포함으로써 전년도에 연방의회가 결의한 전국교회총회를 열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직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올덴바르네벨트를 제압한 것은 총독인 마우리츠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적으로 승리한 것이었다.

 

  1. 도르트총회의 경과

  1617년 11월 11일에 있었던 연방의회에서 전국교회총회를 다음해인 1618년 11월 1일에 개최하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11월 13일에 개최되었다. 총회 전날인 12일에는 교회 대표와 정부 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를 위한 준비 회의를 가졌다. 여기서는 총회를 개회하는 방식과 회의장의 좌석배치, 의결권을 어떻게 줄 것인가 하는 등의 논의와 정리를 했다.

  11월 13일 회의를 시작하기 전, 8시부터 흐로테교회(de Groote Kerk)에서 도르트의 목사 리디우스(B. Rydius)가 네덜란드어로, 어거스틴교회(de Augustijner kerk)에서는 미델베르프의 목사 푸울스(J. de Pours)가 프랑스어로 각각 설교를 하고, 기도를 드렸다. 이 모임을 10시경에 끝내고 회의 장소로 정해진 크로베니르스도렌(Kloveniersdoelen)으로 옮겼다. 회의는 설교를 한 리디우스 목사의 개회 인사와 함께 회의를 위한 뜨거운 기도가 있은 후 정부측의 헬더란드의 대표인 흐레고리우스(M. Gregorius)의 개회 선언과 함께 시작되었다.

  11월 14일은 의장단 선출과 함께 실제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의장에는 프리스란드의 대표로 파송된 보헤르만(Johannes Bogerman) 목사가 선출되었다. 사실 보헤르만은 마우리츠의 지지를 받는 인물로서 회의에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실제로 영향력이 컸다. 따라서 아르미니우스주의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어서 의장 보좌역에는 로랑두스(Rolandus), 파우켈리우스(Faukelius)가, 서기에는 호미우스(Hommius)와 다만(Damman), 의장 특별 비서에는 아메시우스(Amesius)가 각각 선출되었다.

  11월 15일 제4차 회의부터는 쟁점 사항인 교리 논쟁에 관한 심의에 들어갔다. 이 회의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회의에 소환하는 것과 그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직접듣기로 하는 결의를 했다. 따라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소환해야 하는데, 소환대상과 수를 결정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았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 입장의 대표로 이미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유트레흐트의 대표(목사2, 장로1)들과 그 밖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진영의 주들로부터 각각 3인의 대표를 선출해서 도르트총회에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총회는 11월 16일 전날의 회의에서 결의한 내용에 대해서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즉 소환대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하나의 그룹(교회 안의 또 하나의 교회)으로 소환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회는 그룹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소환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때 소환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12명이었고, 소환장을 받은 후 14일 이내에 회의장에 출두해야 한다는 문서를 보냈다. 총회는 각 개인에게 소환장을 보낸 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면서 회의는 이어갔다.

 

  1. 프로액타(Pro-Acta)에서의 심의

  도르트총회는 회의의 진행상 두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11월 13일 개회, 16일에 소환장을 작성해서 보낸 다음 19일부터 12월 5일까지 진행된 회의로서 아르미니우스주의 진영의 대표들이 도착할 때까지 총회에 제기된 또 다른 안건들을 심의했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관련한 교리적 사항은 그들이 도착한 12월 6일부터 다루었기 때문에 도르트총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먼저 진행된 회의를 전회의(前會議, Pro-Acta)로 지칭한다. 따라서 항의서와 관련한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한 실제적인 심의는 1619년 1월 14일 회의석상에서 그들이 퇴장명령을 받을 때까지였고, 이틀 후인 1월 16일부터 항의서에 대한 도르트총회의 입장을 정리하는 19개 분과로 나뉘어 면밀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 5월 6일에 모든 위원들(외국에서 파송된 대표 포함)이 참석한 가운데 도르트신조를 낭독함으로써 채택이 되었다.

  그러나 도르트총회는 신조만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전회의(Pro-Acta)를 통해서 네덜란드교회로서는 매우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했다.

  즉 첫째, 네덜란드어 성경 번역에 관한 건인데, 아직까지 성경의 원어로부터 번역된 네덜란드어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의장 보헤르만은 원어로부터 직접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성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제안했다. 회의는 만장일치로 번역할 것을 결의하고 번역위원들을 임명했다.

  둘째, 신앙문답의 설교와 교육에 관한 건으로 역사적 기독교의 정통을 계승하는 개혁파교회로서의 특징을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는 결의를 했다. 즉, 네덜란드교회는 가브리엘(P. Gabriel)에 의해서 이미 1566년에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이 도입되어 일부 교회들에서 설교를 통해서 가르쳤다. 1586년에 이르러서 헤이그총회에서 처음으로 모든 교회가 신앙문답을 설교할 것을 공적으로 결의해서 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모든 교회에서 실시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따라서 도르트총회에서 “다시 한 번 결정한 신앙문답 설교를 확인하고, 그 의무를 강조해야 하는데, 신앙문답 설교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결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매년 신앙문답서를 설교해야 한다. ② 신앙문답서를 설교함에 있어서 요약해서 짧게 설교해야 한다. ③ 강대상이나 심방을 통해서 신앙문답서를 설교하는 곳에 충실하게 참석해야 하는 의무를 환기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설교자는 끊임없이 충실하게 신앙문답서를 계속해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다음은 신앙문답서를 교육해야 한다는 결의로서 ① 부모는 가정에서 신앙문답서를 교육해야 한다. ② 교사는 학교에서 신앙문답서를 가르쳐야 한다.(적어도 한 주에 2일은 가르쳐야 한다.) ③ 설교자, 장로, 환자를 심방하는 자는 신앙문답서를 가르쳐야 한다. 짧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해야 한다는 결의를 했다.

  셋째, 이교도의 자녀들의 세례 대한 문제에 관한 것이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즉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훌세보스(Hulsebos) 목사가 암스테르담교회의 당회와 노회에 편지로 질의한 문제였다. 부모가 모두 이교도인 아이가 크리스천 가정에 입양이 됐을 경우에 양부모가 입양한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해서 크리스천으로 양육하기를 원하는 경우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의였다.

  이에 대해서 도르트총회는 의견이 나뉘었다. 그렇지만 총회는 양자로 입양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 아이가 성장해서 자신의 이해력으로 하나님과 복음을 깨달아 믿음으로 고백한 후에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결의를 했다. 또한 세례의 증인들도 각별히 그 아이가 신앙교육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넷째, 목사후보생의 준비 교육의 건으로서 교육 과정에서 목회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라인덴(Leiden), 프라네커(Franeker), 흐로닝헨(Groninngen), 하르더위크(Harderwijk) 등의 신학교를 중심으로 후보생 교육을 했으나, 이때 신학교육은 신구약석의, 교의학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였다. 윤리학, 설교학, 신앙문답, 교회법 등과 같은 목회현장에서 감당해야 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교육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후보생교육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인 실천적인 분야에 대해서 고려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이에 대해서 구체적인 성과물을 도출하지 못했다.

  총회가 결의한 것은 후보생들이 교회에서의 위치와 권한에 관한 것이 전부였다. 즉 ① 후보생 신분으로 설교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조건을 전제로 노회나 지역 대회에 그 판단을 맡겼다. ② 후보생은 성찬과 세례를 집례할 수 없다. ③ 당회나 노회에 배석하는 것은 유익하지만 각 회의에 그 판단을 맡겼다. ④ 후보생이 교회에서 성경을 낭독하는 것은 각 교회의 재량에 맡겼다.

  다섯째, 출판물의 검열 건으로서, 당시 네덜란드는 통제가 어렵고, 무질서하게 출판이 되어 이단적인 문서를 비롯해서 많은 출판물이 유포되면서 교회들이 혼란에 빠졌다. 특별히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선전하면서 칼빈주의의 견해를 증오하는 감정을 품고 많은 소책자를 출판하여 유포함으로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논의와 결정을 위한 안건이었다.

  이 건에 대해서 위원들은 정부측과 교회측의 대표들이 검열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요청했다. 따라서 출판물 검열과 관련한 규정을 제정할 것을 의장에게 요구했다. 결국 총회는 규정을 만들어 검증하고, 그것을 승인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규정에 따라서 총회의 이름으로 정부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고 공적인 명령으로 이단적인 문서의 출판이나 출판물의 악용과 도용을 하지 못하게 하고, 그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 결의 이후에 후속 조치는 아무것도 된 것이 없었다. 규정을 작성하지도 않았고, 총회가 다루지도 않았다. 총회는 아무런 결정도 못한 것을 12월 22일 정부가 일방적으로 규정을 만들어 명령을 했고, 총회는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만 했다. 하지만 정부가 만든 규정과 명령은 실제로 어떤 기능도 하지 않았다.

 

  1. 도르트신조의 성립

  도르트신조를 채택한 총회는 신학적, 정치적 입장에 따른 복잡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결국 1619년 1월 14일 아르미니우스주의 진영의 대표들을 회의장에서 퇴장시킨 다음, 이틀이 지난 16일에 비로소 아르미니우스주의 진영에서 제출한 ‘견해서’에 대한 심의를 시작했다. 회의는 19개 분과로 나누어 심의를 거듭했는데, 모든 위원들은 각 분과에 소속되어 ‘항의서’ 제1조부터 심의해서 판정문을 작성했다. 오전 일정은 각분과가 각각 따로 모여서 각 조항마다 문제점과 사안을 고려해서 판정문을 작성하여 총회에 제출하면, 오후에는 전체회의로 진행하면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점을 성경적인가” 하는 것을 검증했는데, 이때 국내외를 막론하고 신학자, 신학교수가 논의를 주도했고 위원들의 토론을 허락했다.

  1월 17일부터 거의 매일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분과회의와 총회를 열어서 심의를 하면서 조언과 문제점에 대한 의견을 나눈 후 3월 6일에 그동안 심의한 항의서 5개 조항에 대한 판정문을 전체회의에 제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문서들을 전체회의에서 채택하는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오갔지만 결국 비공개로 하는 것을 결정했다. 영국의 대표들은 강력하게 공개적으로 할 것을 요구했지만 총회는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해서 비공개를 원칙으로 결정했다.

  각 분과에서 제출한 판정문을 3월 6일 오후부터 낭독을 시작해서 21일까지 위원들이 그 내용의 전체를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많은 문서에 담긴 내용을 어떻게 하나의 문서로 축약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자세한 심의와 논의를 거치면서 두 주간에 걸쳐서 낭독을 해야만 할 만큼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어떻게 조합해서 최종적인 문서로 작성을 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이렇게 회의가 진행되는 사이에 의장인 보헤르만은 이미 사실상의 최종안의 초안을 자신이 직접 작성하고 있었다. 의장으로서, 또한 그가 가지고 있었던 판단에 따라서 회의의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사전준비를 한 셈이다. 따라서 낭독이 끝난 다음날, 즉 3월 22일 오전에 열린 126차 전체 회의에서 의장이 작성한 제1조항에 대한 초안을 제시했고, 이어서 오후에 열린 127차 회의에는 제2조항을 제시했다. 이렇게 해서 25일에는 의장이 제시한 전체 초안을 심의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 수정, 가필을 하는 형식으로 최종안을 완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회장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것을 총회가 그대로 받는 형식에 문제가 있다고 영국의 대표들이 격렬하게 반대함으로써 최종안을 작성하는 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최종안 작성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된 다음에 위원회는 빠른 속도로 초안을 마련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새로운 문서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의장인 보헤르만이 이미 작성해 놓은 초안을 검토하는 수준의 작업이었다. 보헤르만은 자신이 초안을 작성하면서 나름의 원칙을 갖고 있었는데, 위원회의 작업에도 그것을 반영하도록 요구했다. 즉 “네덜란드교회에 평화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회의의 목적에 따른 네덜란드교회의 교회형성에 도움이 되는 것. 따라서 서술방식이나 문체 등 네덜란드교회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사안은 알기 쉽게 표현되어야 할 것. 먼저 바른 견해를 제시하고, 그 후에 이단적인 견해를 배척한다는 서술 구성으로 할 것.” 이러한 원칙에 대해서 영국의 대표로 참석한 칼튼 감독도 동의했고, 위원회도 이에 따라서 논리적, 학문적 형식의 문서보다는 일반적인 형식의 서술 방법을 채택하여 작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작성된 문서를 각 분과에 다시 보내서 의견을 듣고, 요청된 내용에 대해서 검토와 함께 첨삭을 하여 완성된 문서를 총회에 검토를 요청함으로 중단되었던 총회가 4월 16일(129차)에 속회를 하여 18일(130차)까지 원안을 검토하여 승인했다. 18일 오후에 열린 131차 회의에서 신조의 결론부분에 ‘예정교리를 중상하는 자에 대해서 배격한다.’는 말을 넣자는 의견이 개진되었고, 이 단어를 놓고, 다시 22일까지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까지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넣지 않는 것으로 결착되었고, 23일에 위원들이 작성된 신조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5월 6일 총회는 대의원 전체가 회의장으로부터 흐로테교회(de Groote Kerk)로 옮겨 그곳에서 보헤르만 의장이 라틴어로 기도를 하고, 두 사람의 서기가 승인된 “도르트신조”를 공적으로 낭독함으로 공포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도르트신조는 총회 과정에서 칼빈주의 진영의 일방적인 진행이었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신조의 내용이 편협한 정통주의를 담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실제로 도르트신조를 충분히 읽는다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신조의 내용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도르트신조는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항론파에서 문제로 제기했던 것에 대한 답변 형식의 정통신앙에 대한 확인이었기 때문에 편협한 판단이라는 말은 결코 부합하지 않는다. 특별히 기존의 예정론 이해에 대한 재확인이면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답하는 수준의 문서이다.

  한편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일반적으로 불리고 있는 주제도 항론파들이 제기한 항의서에서 지적한 5가지 내용에 대한 답변을 체계화한 것으로서 칼빈주의 진영에서 그러한 교리체계를 만들어서 제시한 것이 아니라 도르트신조의 작성 과정에서 항론파가 제시한 ‘항의서’의 내용에 따른 대답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도르트신조는 역사적 기독교회의 정통신앙을 재확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시대적 상황과 관심에 대한 정통적 신앙의 재확인이라는 의미로 2천년 기독교회의 역사적 신앙을 계승시켜 주는 위치와 권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역사적 기독교회의 정통을 계승하는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라면, 반드시 이 신조에 대한 이해와 고백은 필연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