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신앙|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_정요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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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신앙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정요석 목사_세움교회>

 

그리스도인은 감정과 정서까지도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로 순화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시인의 ‘깃발’ 전문

  깃발은 펄럭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저 푸른 해원에 도달케 해달라고 강하게 절규합니다. 저 푸른 해원! 이것은 시인 유치환이 꿈꾸고 그리고 있는 이상향일 겁니다. 인간이기에 도달할 수 없는, 땅에 발 딛고 있는 직립동물이기에 가 볼 수 없는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것에 대한 목마른 그리움을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지르기에, 깃발의 펄럭임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허공에서 나부끼는 깃발은, 순정이 물결같이 나부낍니다. 순정이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낄 때, 애수는 백로의 날개처럼 하얗고 넓은 슬픔을 펴고 맙니다. 슬픔을 뚝뚝 떨어뜨리며 하얀 날개를 편 백로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슬픔으로 깃발은 나부낍니다.

  그 깃발은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려 있지만, 그 맑고 곧음만으로는 깃발에게 자유와 초월이 없습니다. 오히려 맑고 곧은 이념에 매달려 있기에, 더욱 해원을 향하여 그리움은 뻗어나가는지 모릅니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산정 위의 얼어붙은 그 표범처럼, 더 높은 곳을 향한 그리움입니다. 끝없이 비상하며 백로처럼 날개를 펴지만, 멀리 날지 못하고 깃대를 인해 다시 돌아와야 하는 시지프스의 비극입니다.

  허한 넓은 공중에 있는 한 폭의 깃발의 나부낌에서 슬프고도 애달픔을 맨 처음 본 이는 유치환일까요? 그만 깃발에서 영원한 동경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이면 모두가 무한한 하늘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중력이란 것! 인간을 끝없이 땅의 중심으로 붙들어 매는 그 중력이란 것. 이런 세속의 중력에서 벗어나 한 치라도, 조금이라도 하늘로 도달하고 싶은 인간은 모두 백로처럼 날개를 펴는 애수를 보았습니다.

  깃발은 바람에 나부끼되, 반드시 푯대에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푯대를 벗어나는 순간 깃발은 더 이상 깃발이 아닙니다. 중력을 벗어나 하늘에 이르고 싶지만, 사람은 땅을 벗어나는 순간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고 언제 땅으로 큰 충격과 함께 떨어질지 모릅니다. 하늘에 닿고 싶지만, 땅에 발을 딛어야만 하는 인간의 비극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도,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도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영원을 향한 향수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에서도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이 되지만, 신자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알기 때문에 풍성한 감성이 있지만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낭만이 있지만 낭만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깃든 음악과 미술과 운동과 문학을 즐기고 누리지만, 예술 지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만든 감상의 세계에서 허우적대지 않습니다.

  깃발은 깃발일 뿐입니다. 거기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세계관입니다. 기독교인은 신앙으로 감정을 정화합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깃발을 깃발이 되게 하는 것이고, 사람들 간의 여러 질서를 인식하고 존중한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잘 알아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고 모든 것을 잘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시기에 심히 좋게 지으신 하나님의 그 좋으신 질서를 온 마음과 정서로 그대로 받아들여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정과 정서까지도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로 순화하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