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전쟁과 평화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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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전쟁과 평화를 생각한다

 

  7.27 정전 협정 65주년. 한반도의 종전과 평화 협정에 대한 소망이 크다.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다. 특히 명분이 모호한 소모성 전쟁의 트라우마는 20세기의 세계사와 주요 참전국이 겪은 고통으로 충분히 증명된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 후 독일의 베트만 홀베크는 그 전쟁의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단답할 뿐이었다. “아, 일이 이렇게 될 줄 진작 알았더라면……”

  공식 3만 개 이상의 핵무기로 가득한 현 세계는 더더욱 인류 멸망에 직면해 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핵 전쟁에서 도시를 표적으로 할 때 100메가톤의 위력만 있어도 핵겨울을 야기한다.”고 결론을 내린 지도 35년이 되었다. 이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가 비핵화를 그토록 갈구하는 이유이다.

  또한 1997년의 카네기 위원회의 전쟁 반대를 위한 보고는 지금도 회자된다. “오늘날 전쟁에서 한 명의 군인이 죽으면 평균 열 명의 민간인이 죽어야 하고 그 중의 반은 어린이라고 한다.” 전쟁만큼 참혹하게 생명이 파멸되는 경우도 없다. 그래서 예부터 전쟁에 대한 논쟁이 기독교회 내에서도 부단히 이어졌고 대체로 정당한 전쟁(Just War, Righteous War)의 개념으로 이 문제를 풀어 왔다.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을 증진시키고 악을 피하기 위한 방어적 전쟁은 정당하다고 보았다. 루터나 칼빈에게도 정당한 전쟁이란 평화를 깨는 부당한 공격을 막고 평화 유지의 정의를 위한 방어전을 뜻했다. 청교도들도 사회의 정의와 평화 유지를 위한 전쟁을 인정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전쟁에 시민으로서 참여 가능하나 하나님의 권위가 보증하는 정당함이 없을 땐 거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전쟁이 여타의 셈법이나 탐욕에 기인하지 않고 다만 평화를 지키기 위한 목표로만 타당하다는 뜻이다.

  캠벨 몰간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기독교 시대에는 전쟁이 결코 정당하지 않다는 전쟁불가론자들도 있다. 그러나 세속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정부가 타국으로부터 불법적 공격을 당했을 때 자국민을 보호하고 평화를 보존하며 악을 방어하는 것은 의무이다. 이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 위에서 평화 수호를 위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그래서 월터 카이저가 구약의 전쟁에 대해 내린 정의는 현대전에 대해서도 적실하다. “전쟁은 오래 참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책망에 반항하는 큰 악을 다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꺼리시지만 궁극적으로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정당한 전쟁도 있지만, 전쟁은 발생 안 하는 게 가장 좋기에 우리는 평화를 지향하고 그것을 침해하는 대내외적인 요인들과 전쟁을 예방하는 평화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태도, 가능한 한 평화를 추구하는(롬12:18) 마음을 잃지 않고 최후적 수단으로서 전쟁을 허용하되 그것은 생명을 파멸하려는 공격과 탐욕적 침략을 막는 방어전이라는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한다.

  사실 정당한 전쟁의 개념을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정당한’이라는 윤리적 결론을 최종적으로 누가 무엇에 근거하여 내리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에 입각한 원리를 잘 세워 두어야 한다. 현대전에서 빈발하듯 자기 이익만을 위해 아전인수식 명분으로 전쟁의 정당성을 강변함은 지양하도록 선도해야 한다. 전쟁 발발의 원인은 표면보다 이면의 국제 질서와 자국 이익을 위한 대립의 산물인 경우가 더 많다. 민족, 종교, 천연자원 등, 정치 경제적 여러 요소가 혼재되고 대리전도 나타난다. 심지어 인류 보편의 정의를 위한다는 명분의 전쟁도 관련국들의 철저한 타산에 의한 결과물임이 밝혀지곤 한다.

  ‘예정된 전쟁’의 저자 그레이엄 엘리슨은 “전쟁을 향한 길은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다양하고 더 매끈하게 닦여 있다.”고 경고한다. 전쟁은 합리적 생각이나 상상력을 넘어서는 발발의 속성을 갖는다. 설마가 사람 잡는 것이다. 명백히 예견되는 전쟁이 있는가 하면 예측 불가한 전쟁도 발생한다. 따라서 안정된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의 요인이 사라져야 한다. 전쟁의 항시적 개연성은 불안을 초래한다. 조지 오웰의 ‘1984’에 의하면 권력자(빅 브라더)에게 평화란 전체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국가를 항시적 임전 상태에 두는 것에 불과하다. 늘 전쟁의 위기감을 조성해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자유를 제한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하다 맹종하게 만든다. 일당 독재의 북한이나 독재하의 남한이 그랬다. 이런 책략에 의해 조성된 불안은 실제 전쟁 상태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이리에 아키라는 “진정한 평화 체제는 액면 그대로의 전쟁은 물론 예측되는 전쟁의 불안까지 사라지는 단계”라고 했다. 우리는 한반도가 그런 진정한 평화를 누리도록 기도하며 힘써야 한다. 전쟁도 병인학적으로 적절한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 관련국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 전쟁이 힘든 만큼 평화도 힘들다. 그 만큼 당사자들의 대가가 지불돼야 한다. 시간도 물질도 대화도 인내도 필요하다. 케네디가 토로했듯이 ‘힘들고 고통스런 평화’이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보다는 천배 만배 낫다.

  상생의 전략과 평화 공존을 위해 당사국 서로가 근원적 해결을 모색하고 실효적 종전과 평화 협정을 통해 이를 실행해야 한다. 이제 결코 전쟁은 안 된다.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갈구하며 우리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을 깊이 새긴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데 실패한 자들만이 그 역사를 되풀이하는 벌을 받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