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대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 최덕수 목사_현산교회 >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주님의 말씀과 뜻에 편들며 수종들어야
사람들은 회의가 보다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정제한 끝에 나온 의견이 모든 면에서 나은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와 정부와 기업은 물론, 심지어 폭력배 집단까지도 회의를 통해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敎會)’와 ‘장로회(長老會)’란 명칭 자체가 교회가 회의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교회에서 다양한 회의들이 이루어지는데 교회 회의 중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는 총회 회의이다. 총회는 노회와 어떻게 다른가? 본래 개혁교회는 상회(上會) 개념이 없다. 프랑스 개혁파교회 규칙 제1조에 “어떠한 교회도 타교회에 대하여 상위 또는 지배를 요구하지 못한다”라고 적시되어 있다. 이런 원칙은 한 지교회 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엠덴회의(1571년) 조항 1조는 “당회가 집사회의 구제 사역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모든 직분은 상호병립하지 수직상승하지 않는다는 장로교 정치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나 나나 다 똑같다’는 식의 수평적 질서만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간에 수평적 질서와 수직적 질서가 공존하는 것처럼, 노회와 총회 간에도 수평적 질서와 함께 수직적 질서가 세워져야 한다. 만약 수직적 질서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총회는 노회보다 더 넓은 회의체에 불과할 뿐 총회가 내린 결정은 아무런 구속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수직적 질서도 세워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권위 없는 질서는 존재할 수도, 세워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권위는 질서의 원리다. 교회의 권위는 누구에게 있는가? 칼빈은 “모든 공의회를 주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요, 이러한 그의 위엄을 인간과 공유하시지 않는다”(기강 4.9.1)라고 하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권위자로 인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공적인 설교와 사적인 복음 전파는 물론 가정 심방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거룩한 복음의 말씀의 실천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 회의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오늘날 말씀의 통치를 가장 적게 받는 영역 중 하나가 교회 회의다.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와 태도, 절제된 언사,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기다리는 주의 깊은 자세가 요구되는 곳이 교회 회의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말씀과 성령보다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일들이 적지 않고 위로와 격려를 받기보다 마음이 나뉘고 상하는 일들이 더 많다.
총회는 이런 유아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는 전 과정이 전통과 관행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회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게 하는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총회에 참여하는 총대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과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지교회 직분자는 회중의 투표를 통해 세워지지만 그 직분은 회중들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총회 총대라는 직분 역시 외형상 노회원으로부터 위탁받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총대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대리자인 총대는 어떤 자세와 태도로 총회에 임해야 하는가? 여호와의 총회의 영원한 의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하며 발언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듯 해야 한다(벧전 4:11). 다른 사람의 발언을 들을 때는 그 주장이 거룩한 복음에 합당한지 여부를 살펴야 하고 거수할 때는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주님의 뜻에 편을 들어야 한다. 모름지기 총대는 하나님의 뜻에 수종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