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수상
겉의 말씀과 속의 말씀
< 김수환 목사, 새사람교회 >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전하려면 ‘겉의 말씀’이 아닌
‘속의 말씀’을 찾아내야 한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는 안식교 교인들에게 주일예배를 드려야 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면 자기들만큼 오직 말씀대로 믿는 사람들이 없다고 강변한다. 극단적인 문자주의(文字主義 literalism)와 ‘겉의 말씀’의 대표적인 예이다.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라”(롬2:28)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경 역시도 겉만 보면 안 된다. 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식교인들과 동일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1901-1943)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여기에서의 ‘봄’은 단순히 계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조국의 국권이 회복되는 때를 은유적(隱喩的 metaphor)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자로 표현된 ‘봄’이 ‘겉의 말씀’이라면 ‘빼앗긴 국권이 회복되는 것’은 그 ‘봄’이 내포하고 있는 ‘속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이 부분을 ‘문자적인 봄’으로만 이해하면 이 시를 쓴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대부분의 성경은 이 시와 같이 은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도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마13:34, 막4:34)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교훈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문자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은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문법적으로만이 아니라 그 본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의미, 즉 이면의 말씀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문법적인 1차적 해석을 중시하는 이유도 바로 2차적인 의미를 제대로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앞의 이상화의 시에서처럼 ‘빼앗기다’ 혹은 ‘봄’과 같은 문자적인 뜻을 잘 모른다면 2차적 의미는 더욱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하신 말씀에서와 같이 우리가 땅의 일(역사 혹은 문법)을 잘 아는 만큼 하늘의 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기에 약간의 국어 실력만 있어도 성경 해석은 훨씬 더 용이해진다. 사실 신학은 바로 시작하기엔 버거운 학문이다. 순수기초과학, 문학, 그리고 철학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성경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성경과 신앙은 보이는 형이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상 건너편의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땅의 것으로 풀어내야 하기에 우선 땅의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단순한 종교적 열의나 신비적인 요소만을 기대하며 연구를 게을리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직무유기요, 불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 한 구절을 읽고 대충 묵상한 것을 들고 강단에 올라가는 것을 삼가 조심해야 한다. 어느 전문가 이상으로 성경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야한다.
우리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강도사고시를 치르고, 노회에서 인허를 받는다. ‘강도’라는 말은 ‘진리의 말씀을 강론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겉의 말씀’이 아니라 ‘속의 말씀’을 찾아내고 분별해 낼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으며 만일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9)라며 ‘다른 복음’에 대하여 엄중 경고한다. 여기 ‘다른 복음’은 바로 ‘율법주의’를 말한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이면의 말씀을 발견하지 못하고 표면의 말씀만을 전한다면 또 다른 율법주의자이다. 율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진리이신 예수에게까지 나아가야 한다. 만일 예수에게 나아가지 못하고 율법 자체, 즉 ‘겉의 말씀’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이 바로 다른 복음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전파하는 말씀 안에 다른 복음이 섞여 있지 않도록 잘 분별해 내야 한다.
어느 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을 향해 “당장 이 집에서 나가고, 다시는 들어오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만일 순진한 아들이 이 말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고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다면 정말 어리석고 불행한 아들이다. “집을 나가라”는 말은 아버지께서 몹시 화가 나셨다는 말이지, 정말 “집을 나가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종종 이런 식의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하늘)아버지의 말씀을 문자적, 혹은 표면의 말씀으로만 해석하여 숨어있는 아버지의 뜻을 놓치게 된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 목회자들이 ‘속의 말씀’을 발견하지 못하고 ‘겉의 말씀’만을 전하게 된다면 집을 나가 버린 자식과 같이, 본의 아니게 성도들을 하늘 아버지의 집인 천국으로부터 밀어내는 무서운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철저할 만큼 표면의 말씀과 이면의 말씀, ‘겉의 말씀’과 ‘속의 말씀’의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가 가시 달린 밤송이를 그대로 먹을 수 없기에 알맹이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모두 벗겨 낸다. 이와 같이 ‘겉의 말씀’도 그냥 먹을 수 없기에 ‘겉의 말씀’을 벗겨내고 ‘속의 말씀’을 찾아내야 한다. 가시 달린 밤송이 같은 ‘겉의 말씀’을 그대로 설교 단상에 올려놓을 순 없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먹을 수 있는 참 양식이 아니다.
성경(헬라어)에는 “본다”는 말이 4종류(옵타누마이, 에이돈, 불레포, 호라호)나 된다. 말씀을 맡은 자들은 그런 영적 시각으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겉의 말씀’이 아니라 ‘속의 말씀’을 찾아내는 작업을 필수적으로 해내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옳게 분별해 내고 전하는 이 시대의 참 설교자요, 참 목회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