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 교회의 미래, 소통이 답이 아닐까?<2>_강치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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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미래소통이 답이 아닐까?<2> 

 < 강치원 교수, 강원대 역사학_남포교회 장로 > 

 

 

하나님과의 소통, 교인 상호간의 소통

시대 및 사회와의 소통  

 

   교회의 소통을 논하기 위해서 역사신학의 개념을 좀 빌어보자. 역사신학은 신학의 사회적, 역사적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역사적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신학의 발달과정을 추적한다.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역사적, 시대적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으로서 형성되어 왔다. 물론 신앙의 전제 조건인 계시는 초자연적 성격을 가진다. 하지만 계시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계시는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와 시간 속에서 일하신다. 성경만 아는 사람은 성경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텍스트(Text)만 아는 사람은, 다시 말해 콘텍스트(Context)를 모르는 사람은 텍스트도 모른다. 모름지기 신학은 역사와 시대에 대답해야 한다 

   신학과 역사의 관계는 사상과 역사의 관계와 유사하다. 사상은 역사와 시대의 산물이자, 그 반영이다. 사상은 역사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사상은 역사에 영향을 주기도 하며 역사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때로 사상은 역사와 무관하게 자기 발전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상이 살아남으려면 역사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결국 신학과 역사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 가장 훌륭한 신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시대의 토론, 즉 소통이었다. 교회사에서 보면 신실함과 고결함은 단지 의식이나 제의, 혹은 관습 등 행위를 규율한다고 해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통과 토론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소통과 토론은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 의견의 불일치나 불편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결국 발전하고 진보한다. 토론은 다름을 인정하고 같음을 지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론과 소통의 근거는 텍스트로서 성경이었고, 또 성경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의 정경화 과정, 즉 어떤 책을 성경으로 할 것인가 라는 논의 역시 일종의 토론이 아니던가. 소통을 통해 교회의 지지가 있었기에 정경은 성립했다.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는 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았다. 나는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생애 속에서 소통과 토론을 본다. 종교 개혁이나 개혁주의 신학은 당시 가톨릭, 성공회, 루터파, 개혁파, 그리고 재세례파 사이의 소통과 토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종교개혁의 다섯 솔라(Sola)인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나 개혁주의의 5대 강령 TULIP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역시 소통과 토론의 결과이지 않은가. 결국 신학의 발전, 교회의 위기 극복은 성경을 텍스트로, 토론을 콘텍스트로 해서 이루어져 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앙생활도 소통이다. 소통해야 할 대상은 세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소통,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서의 교인 상호 간의 소통, 또 다른 하나는 비신자나 시대 및 사회와의 소통이다. 소통의 방법은 대화와 토론이다. 나는 대화를 차분하게 주거니 받거니로 정의한다. 토론은 터놓고 주거니 받거니이다. 대화나 토론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예컨대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화하자고 해 놓고 혼자만 말한다면 대화라고 지칭할 수 없다. 또 윽박지르며 말한다면 역시 대화가 아니다. 윽박지르지 않으려면 경청을 위한 인내와 훈련이 필요하다. 토론은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터놓을 것인가가 관건이다. 대화이건 토론이건 주거니 받거니하기 위해서는 질문이 절대 중요하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에 대한 답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교육과 소통을 통해 뜻을 이루시지 않을까. 나는 기도하고 있다. 주일 학교 학생들이 성경을 중심으로 소통의 역량을 기르도록 교육 운동을 펼쳐 보면 어떨까. 소통 프로그램은 유대인의 하브루타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교회 교육에서 소통이 중요시 되는 날을 꿈꾸어 본다. 소통은 대화와 토론이다. 대화와 토론의 본질은 질문이다. 결국 교회 위기 극복의 답은 질문에 있지 않을까. 한국 교회의 미래, 소통에서 그 답을 찾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