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섬기며| 작은 개를 통해 배운 것_박종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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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섬기며>  

작은 개를 통해 배운 것    

< 박종훈 목사, 궁산교회 >

 

 

“말은 안 통해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확실한 전달법”

 

    사택 입구에 털이 무성한 발발이를 키운다. 마당에 작은 집을 두고 목 끈을 달아 제한된 범위에서 활동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주 순한 개다. 이웃 동네 할머니가 세례 기념으로 분양해 주었는데 성품 좋은 원 주인을 닮아서인지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짖기보다는 그저 좋아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지나가며 한 번씩 밥그릇을 확인하곤 하는데 어느 날 그릇에 검정콩알만 한 것들이 먹다 남은 사료와 함께 있었다.

   자세히 보니 털이 있는 동물에 기생하며 흡혈하는 진드기였다. 온 몸에 숨바꼭질하듯 숨은 진드기를 몇 마리 잡아 자기가 먹는 밥통에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근래 식욕도 저하되고 마른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은 자신의 피를 빨아대며 병을 옮기는 이 진드기 퇴치를 위해 얼마나 괴로웠을까?

   목줄이 없이 자유롭다면 아마 진흙탕에 가서 뒹굴든지 물속에서 목욕을 해서라도 진드기를 없앴을 것이다. 흑염소도 진드기에 노출돼 있지만 그들은 울타리 안에서 방목하기에 몸에 붙은 진드기를 철망 울타리에 비비며 퇴치하곤 한다. 하지만 이 개는 제한된 장소에서 스스로 해결 못하는 처지인 것이다. 주인과 말이 안 통하니 진드기를 없애 달라는 하소연 대신 나름 의사 전달 방법으로 평소 주인이 자주 보는 밥통에 진드기를 잡아 넣어둔 것이다. 그제야 개의 몸을 다시 살펴보니 온몸에 진드기가 득실댔다. 그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었다. 몇 번 분무기로 살충도 했지만 워낙 심해 결국 가축병원에서 사 온 주사요법으로 겨우 치료를 했다.

   동물이기에 말로 의사 전달을 못했지만 행동으로 알려준 발발이를 보며 내 자신의 목회사역을 뒤돌아본다. 이곳에 와서 태어난 막내가 군대 복무를 앞두고 있으니 지금은 제 2의 고향이라고도 하겠다. 기독교문화와는 거리가 먼 시골이라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어려움이 많다. 더구나 배움이 적은 노인들은 우리로선 알기 쉬운 용어도 뜻을 잘 몰라 괜한 오해도 하고 웃음을 자아내는 일들이 많았다. 

   반복 또 반복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며 처음 배운 것만 전부로 알고 고수하는 그들에게 할 말을 잃곤 한다. 그럼에도 말씀을 전하는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이어 왔고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다. 아마 모든 농어촌 목회자들이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전달법은 있다. 바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시골이란 곳이 원래 유리로 지은 집처럼 서로에게 너무 개방된 구조이다. 그래서 그 동안 본이 못 되는 미숙함도 많았지만 더 좋은 본을 보이려고 노력 중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로 아는 그들에게 사람의 본분을 보여주려 했다. 가부장적 분위기에 익숙한 마을에서 부부가 서로 아끼며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모습과 지나친 노동으로 몸을 상하는 그들에게 쉼과 여유를 통해 인생을 즐겁게 사는 이치를 알려주고자 했다.

   점점 힘들어지는 관행 농법이 아닌 자연을 활용한 농법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 중이며 가진 게 적어도 서로 주고받는 행복을 누리는 삶을 보여주려 한다. 자기 일에 바쁜 중에도 이웃에 봉사하고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서로 수고하는 본을 보이려 한다.

   지금은 비록 바라만 보고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언젠가는 좋은 본을 받아 자연스레 동행하는 교회와 마을의 공동체가 되리라 소망한다. 어쩌면 그들이 뭔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극도로 고령화 되어 모든 게 마음뿐인 상황일지도 모르지만 성급한 마음으로 좌절하지 않고자 한다. 내 생애에 선한 기초만 놓고 가도 누군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날이 오리라 여긴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 하듯이 조금씩이나마 이 마을에 성경적인 문화가 곳곳에 스며들기를 소원한다. 말로는 안 돼도 행동으로는 보여줄 수 있어 그나마 감사하고 소망의 끈이 있기에 오늘도 인내하며 삶의 즐거움을 누린다. 주님은 작은 개와의 행동의 소통을 통해 이 귀중한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