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신년기획| 현대 조직신학의 동향_이남규 교수

0
1620

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2>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현대 조직신학의 동향

< 이남규 교수, 합신 조직신학 >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객관성보다 주관성, 성경 자체의 권위보다

성경의 기능 곧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미로 옮겨왔다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등에서 정통신앙을 떠나온 현대신학

 

 

    현대신학은 더욱 다양해졌고 여러 갈래이며 파편도 많다. 몇 가지 틀에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은 벅차다. 한 가지 말한다면 현대신학의 흐름이란 성경의 권위를 내던짐과 동시에 정통교리를 처음엔 조심스럽게, 조금 후엔 서슴없이 대범하게 떠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소치니(Faustus Sozzini, 1539-1604)가 합리주의적 성경 해석학을 들여왔고, 삼위일체를 부정했으며, 아리우스주의와 펠라기우스를 불러들였다. 그는 윤리를 중심에 두고, 관용, 다원주의를 옹호했다.

   이런 면에서 소치니는 현재 자유주의 신학의 시초라고도 불릴 수 있다. 개혁신학자들은 일찍이 이런 흐름에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란 이름을 붙여 강력히 반대했다. 옛 개혁신학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현대의 많은 신학 사상은 아마도 소시니안주의의 다양한 분파들일 것이다.

    소위 현대신학이란 다양한 역사비평과 함께 성경의 권위를 벗어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성경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나중엔 교리적 사실로부터 벗어난 후 최종적으로는 성경을 인간의 글로 떨어뜨렸다. 그들 중 몇몇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정통 신앙을 벗어난다. 어떻게 성경에 호소하면서,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성경이 진술하는 명제를 그대로 받지 않는 방식으로 시도된다. 즉, ‘성경의 명제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사람이 계시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칼 바르트)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객관성보다 주관성으로, 성경 자체가 갖는 권위보다 성경의 기능 곧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미로 옮겨왔다. 이런 흐름은 최근에도 계속되어 ‘성경 해석자는 본문 자체를 명제로 받으면 안 되며 그것을 등장시킨 세계관을 읽어야 한다’(톰 라이트)는 의견을 우리는 만난다.

   여기서 신학자는 본문의 명제를 걷어내면서 찾아낸 세계관을 우리 시대의 의미로 재구현하는 임무를 갖는다. 그런데 문제는 재구현된 명제가 성경의 명제와 부딪히고 완전히 반대되어도 이 흐름에서는 성경적이라고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적 상황인가?

   문맥 안에 숨겨진 세계관을 읽어내는 인간 해석자에게 최종적 권위가 돌아가는 이런 방식은, “성경의 최고 해석자는 성경이다”는 루터의 명제와 부딪힌다. 따라서 우리가 신약과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2)으로 받는다고 했을 때, 그 해석권이 인간이 아닌 성경 곧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 돌아간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 본문 전체가 그 자체로서 최고의 해석자로 우리 앞에 있을 때 문화의 차이를 이유로 본문의 명제를 무효화하는 시도가 과연 정당한지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인 성경이 과거의 말씀이 아닌 지금 우리를 향하는 말씀으로서 우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히 4:12).

    새로운 성경 해석의 틀 아래서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은 성경이란 이름을 가진 채로 쉽게 정통신앙을 떠날 수 있었다. 신론으로 들어가 보면 무엇보다 삼위일체론이 크게 손상을 입었다. 일부에서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했지만, 그가 근대의 인격개념의 위험성 때문에 인격(persona) 대신에 사용한 ‘존재방식'(Seinsweise)은 오히려 양태론의 위험성을 남겼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분을 없애버린 칼 라너는 양태론에 더 나아갔다.

   일체에 대한 이런 지나친 강조보다 최근에 더 유행하고 있는 것은 몰트만 이후 큰 세력을 입은 삼위의 강조 또는 삼신론적 경향이다. 몰트만은 명시적으로 삼위의 존재론적 한 본질 개념을 버릴 것을 주장했다. 삼위의 관계성과 공동체적 하나됨을 강조하는 자기주장을 그 스스로 사회적 삼위일체라 불렀다. 성부, 성자, 성령이 페리코레시스(상호교통)를 통해 하나 되기 때문에 한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방신학에 호소하지만, 동방신학자들은 본질의 일체로부터 삼위의 페리코레시스를 말했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제 몰트만은 이 페리코레시스에 인류와 피조세계까지 포함시키면서 만유재신론으로 나아간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는 현대신학에 큰 화제를 몰고 왔는데, 신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분열하고 갈등하는 사회와 정치의 여러 문제, 세계의 분쟁, 나아가 환경 및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좋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삼위일체에서 가족적 삼위일체까지 나아간 최근의 삼위일체 담론은 아직 몰트만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교리도 그 교리의 기능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25문). 삼위일체론은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 우리가 받은 것이다. 옛 신학자들이 말한 대로 성부 성자 성령에 어떤 구별도 없다는 자들에게 우리는 삼위를 말해야 하며, 하나님이 셋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일체를 말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최근에 나온 많은 책들은 정통신앙이 말해온 죄론을 크게 벗어난다. 그 중 몇몇은 타락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거절하면서 인간은 처음부터 모두 같은 한계를 갖고 태어난다는 결론으로 가서 펠라기우스에 이르렀고, 또한 인간 안에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다는 마니교의 이원론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싸웠고 거절했던 두 이단에로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 죄는 인간이 원래 가졌던 어떤 결함의 결과로서 물리적인 악과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죄책은 죄를 범한 개인이 아니라 그런 개인을 키워낸 사회구조에 돌아가고, 죄인에게는 형벌보다는 교정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현대 사회 분위기와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어떠한 신학적인 해결은 물론 실제적인 해결도 주지 못한다. 죄가 물리적 악이 될 때, 사람됨을 규정하는 양심, 도덕, 당위, 가치는 사라진다. 오히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묘사하는 인간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즉 선하게 창조된 인간은 타락 후 전적 부패의 상태에 있으며(창 6:5; 렘 17:9), 개인적인 죄만이 아니라 전가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됨으로써 윤리적으로 연대한다(롬 5).

   현대 신학자들이 간과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부지중의 죄도 하나님의 형벌이 따르는 죄(민 15:29)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인간이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닌가?

    죄가 형벌을 불러오는 범법이란 사실을 떠났을 때, 그리스도의 속죄사역도 정통신앙을 떠났다. 현대의 여러 신학자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지칭되는 객관적 속죄, 즉 형벌 대속론을 포기하거나 반대했다. 화목의 능력을 말하기는 하지만, 최근의 경향은 크게 볼 때 화해를 신자 안에 있는 주관적 능력에 돌렸던 슐라이어마허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속죄사역의 일차적인 목적이라는 설명이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과 속죄사역을 정당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를 감화시켜 우리로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 안에서 나타나게 하고, 우리의 사회의 여러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를 가져오고, 폭력을 비폭력으로 바꾸고, 피조물의 질서도 회복하게 하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가장 중요한 형벌대속사역을 버릴 때, 복음의 출발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은 사라져 버렸다. 안타깝지만 교회에서 사용되는 용어들도 더는 거룩, 죄, 심판, 대속, 구원이 아니라, 꿈, 상처, 치유, 비전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형벌 대속이 아니라 우리를 돌이키시고 그를 따르게 하기 위한 모범이라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구호인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도 전혀 다른 의미로 변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모범을 따르는 신실함이 되고 자신과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믿음은 그리스도를 신앙함이 아니라 그의 신실함을 본받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바울이 수없이 외쳤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갈 2:13)과 그의 피로 말미암은 우리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의 구원(롬 5:9)이야말로 지금도 유일한 능력 있는 복음이다.

   새로운 교리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자들은 종종 자기들 자신을 종교개혁자들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들의 교리가 새 교리가 아니라 옛 교리임을 증명하려 애썼다면 최근의 많은 이들은 ‘자기들의 교리’가 얼마나 많이 새로운가를 증명하려 애쓴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이남규 교수> 일/문/일/답

  1.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훼손하는 현대 조직신학의 도전에 대한 개혁주의 조직신학계의 대응책은?

    20세기 초에 미국 장로교에서는 존 그레샴 메이쳔을 중심으로 근본주의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운동이 세속주의의 큰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주요 사명 중 하나가 올바른 옛것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래서 여전히 조직신학자들은 책과 글을 통해 대응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신학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시대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과 신학교가 함께 믿음을 철저히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 현대신학의 새로운 교리에 대한 열망은 사회적 상황들에 대한 기독교적 고민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상황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교리가 잘못돼 그런 상황이 왔다거나 교리를 새롭게 바꾸면 답이 나온다는 생각이 잘못이다. 우리는 사회적 상황들을 보면서 복음이 진정한 답이 됨을 확신해야 한다. 또 정당한 사회적 관심을 갖되 먼저 개인의 믿음과 일상적 성경적 바른 삶으로 사회에 근본적 영향을 끼쳐야 한다.

 

  1. 성경을 묵상할 때 적용적 상황 논리와 주관성의 문제를 잘 극복하려면?

    성경 연구에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성경이다. 권위와 원천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이다. 불신자에게는 성경은 하나의 좋은 책일 뿐이다. 그런데 이 둘만 있으면 가장 주관적인 상황, 즉 자신이 최고해석자가 되는 위험에 빠진다. 따라서 셋째로 교회의 표준문서들, 좋은 주석과 많은 선생들, 동료들과의 교통이 필요하다. 그래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해야 한다.

 

  1. 목회와 신앙생활에서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도구를 잘 활용하는 실제적 방법은?

    개혁교회는 가장 많은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를 유산으로 받았다. 교회는 이런 신조를 믿음의 고백만이 아닌 진리의 잣대와 교육용으로 사용해 왔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구원, 교회,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만나고 정리할 수 있다. 또 요리문답서의 십계명 해설은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1. 도움이 될 만한 최근의 조직신학적 도서를 추천한다면?

    이승구 교수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와 김병훈 교수의 『소그룹 양육을 위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성도들에게 유익하다. 고전으로는 최근에 번역된 김영호 교수의 『게르할더스 보스의 개혁교의학』이 있고 다른 신학에 대한 평가로는 이승구 교수의 『우리 이웃의 신학들』이 있다. 더 세밀히 보려면 합신 교수들이 쓴 『노르마 노르마타』가 있다.

 

 

이남규 교수 약력  

  • 한양대학교 전자공학과(B.S.)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Th.M.)
  • Theologische Universiteit Apeldoorn(Dr.theol.)

<저서>

Die Prädestinationslehre der Heidelberger Theologen 1583-1622, Reformed Historical Theology-Band 10,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9)

<공저>

『칼빈과 종교개혁가들』(개혁주의학술원, 2012)

『칼빈 시대 유럽대륙의 종교개혁가들』(개혁주의학술원,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