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누가 감히 ‘중보’라는 말을 쓰는가?_장대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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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히 ‘중보’라는 말을 쓰는가?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중보기도라는 말은 우리와 타인의 처지에서 사용할 수 없어”

 

   중보자(仲保者)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중보(仲保, mediation)라는 말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든지 하늘(Heaven)과 땅 사이에서든지 항상 그리스도(Kristos)만이 유일하게 그러한 중보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원칙상 ‘중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말고는 어디에도 붙일 수 없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왜 그처럼 ‘중보’라는 말을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말고는 사용할 수 없는 가? 거두절미(去頭截尾)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가장 간명하게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은 제네바 교리문답 제38문답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어떤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희생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은혜를 얻고 진노를 거두시게 하는 직무와 특권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중보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직분에 부여된 고유한 특권(직무)에 속한다는 것이다.

   현재 모든 인류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지어진 목적대로 살아가지 않을 뿐 아니라, 그와 반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무한한 진노가 더욱 크게 가로 놓여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된 것은 잘 아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 곧 사람의 모든 죄의 근본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희생제사(Sacrifice)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용납되고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중보’의 사역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직무를 준비해 두셨다.

   이처럼 중보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직무에 부여된 유일하고도 고유한 특권이며, 그것은 이미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으로 준비된 것이라는 점에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직무에 속한 특권이다. 그러니 그런

그리스도의 직분 외에 추가적인 어떤 기능과 역할도 불필요한 것이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사실을 분명하게 신앙으로 고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서 직무에는 그의 ‘선지자직’도 포함된다. 제네바 교리문답 제1문의 대답, 즉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제2문의 대답,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시어 세상에 두셨다는 것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뜻을 충분하고도 확실하게 최종적으로 알 수 있는 원천(origin or source)또한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중보의 직무이다.

   때문에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도 “아들을 통하여(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최종적으로)” 이뤄졌음을 명확하게 선언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중보로서의 직무에는 그의 ‘왕직’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러한 왕직에 있어 중심적인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Kingdom)인데 그것은 영토(땅)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주권과 통치(능력)와 관련된다.

   결국 ‘중보’의 개념에는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모든 직무를 포함하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의 독특하고도 유일한 의미만이 있는 것인데, 바로 그 독특하고도 유일한 의미 때문에 우리들은 구원자 예수라고만 부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곧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다른 어떤 언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 직무인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포괄하는 독특한 직무의 성격을 유일하게 함의한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라고 한 것은, 문자 그대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기 때문이다.

   흔히 중보기도의 모범이라 일컫는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만 하더라도, 그것은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되는 유익 외에 그 어떤 유익이나 전달의 통로(중보)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찌 ‘중보기도’라는 말을 우리 자신과 타인의 처지 사이에서 사용할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를 도우시도록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에 더해서 ‘그를 도우시도록 중보기도하자’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태초부터 세말까지 새 언약의 중보자(히 9:15) 외에 다른 중보는 없다. 구약의 모든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들조차도 중보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