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미래 국가와 사회에서 기독신자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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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국가와 사회에서 기독신자의 위치

< 김영규 목사 >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자연이나 본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겸손한 태도 가져야”  

 

   미래의 국가나 사회는 지식기반 국가나 사회로 가야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맞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 지식기반 사회가 없었던 때는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지식기반 국가나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지식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야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발전해야 할 미래의 집단 지식

   즉 한 나라가 미래 지속 가능한 지식에 기반을 둔 국가나 사회로 길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합리적 지식이나 전통적 혹은 관습적 지식에 의해서 발전되어 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과거보다 지금 확고히 검증된 기초과학 지식이나 인류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진보된 기술들에 기초한 최고의 합리적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열린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로부터 생산된 지식들을 국가 구성 주체들이 빨리 공유해 가는 방향으로 국가나 사회의 시스템을 확고히 하는 일이 더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전체 경제규모가 개인의 경제규모를 좌우하겠지만, 개인의 경제규모가 크고 삶의 질이 높다고 해서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행복지수의 질에 있어서 상대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그 구성원들에게 그런 최고의 합리적 지식이란 인간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개인의 행복에 어느 정도 크고 작게 기여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 위해서 장기간 국가는 개인들의 성장과 함께 저출산과 장수시대로 가는 사회에서도 통하는 인간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런 프로그램들은 인류의 과거 역사를 통해서나 현재 진보된 어떤 국가의 예들에 의해서도 찾을 수 없으며 앞서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극히 비판적 프로그램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에 있어서 미래 생산 활동에 있어서 자동화 수준과 경제행위자들 수의 적정성에 대한 고려에 못지 않게 개인들의 미래 성장에 대한 맞춤형 진단 능력과 그 진단에 따른 개인별 해법들 및 전체 사회의 그런 지식들의 넓은 공유성을 위한 실천 방안들이 현실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전체 사회나 학교 제도가 한 개인의 맞춤형 진단을 수행할 때 무의식이나 의식과 같은 근대적 개념들에 의해서 진단하였다고 한다면, 최근 전까지도 1초의 반인 500 밀리초 내에 무의식과 의식 세계에 대해서 모두 설명해내야 하는 과제로부터 이제는 뇌세포 내에서 분자들이나 원자 구조들 내부의 젭토 초나 아토 초의 변화들까지 읽어내어 그 합리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든 시점에 와서 인간 발전에 대한 예측된 프로그램들을 찾아내고 그 프로그램들을 가능한 한 빨리 넓게 적용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초과학 지식이나 첨단 과학기술이 갑자기 나노기술로부터 피코 기술로 거치지 않고 바로 펨토 시대나 아토 시대로 바로 넘어가 버린 상태에서 더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과학기술 시대로 넘어와 버렸기 때문에, 산업과 교육도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

   후진적 효소나 촉매 기술을 가지고 먹고사는 길이 좁아 졌고 산업구조의 무게감이 첨단 광학기술 산업으로 급히 옮아가야 겨우 세계 경쟁에 있어서 약간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나 어른들은 그런 최고의 지식을 습득하는 시대에 맞게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 바로 적용해 미래 인재를 길러내야 할 당위성을 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자연’(nature) 혹은 ‘본성’은 젭토 초 기술까지 요구하고 있다. 느린 문화의 상징인 법치사회는 조금씩 축소되어야 하고 어설픈 과학적 지식들과 기술들도 물러나야 하며 모든 인문과학이 기반을 두고 있는 언어생활 일반이나 창작 활동 및 감성들의 표출 활동 일반에도 그런 맞춤형 최고의 지식들이 빨리 적용이 되어야 미래사회로 가는 안전한 자리가 확보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새로운 지식을 팔고 사는 시대로 빨리 발전하는 미래 세계상 앞에 인류 사회가 걸어온 과거의 세계상에 묶여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빠른 지식 정보 사회의 장점을 살려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의사 결정시간을 빨리 흡수하는 제도들과 정치 사회 체계를 구축하여 집단적으로 구성원들 모두에게 지속 가능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더 깊게 성찰하게 하고, 거기에서 발견되고 고증된 진리들을 지구상의 어떤 사회보다 빨리 적용할 필요가 있는 시대로 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급한 대안이 될지 모른다.

   인간 인자들은 긴 역사 자체가 증명하듯이 아주 느린 인자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느린 문화, 느린 생활은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다. 또한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대 시대에 와서 더욱 더 공직자들이나 책임을 맡은 자들은 고도의 민주사회의 이념이나 청지기 사상에도 불구하고 결코 명예직이 아니라는 것도 잘 증명이 되고 있다.

   크고 작은 다수들을 대표하는 자들이 특별한 능력을 갖지 않으면 그 명예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능력 중에서 자연이나 본성 앞에서 항상 자신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놀라운 합리성을 넘어 급하게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그 자연이나 어떤 본성을 인간이 새롭게 창조하거나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자연이나 본성을 주의하고 보호하되 가능한 멀리서 바라보는 연습에 열중하면서 그런 것에 대한 최고의 지식들이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급하게 함부로 그 자연이나 본성에 훼손을 가해서는 아니 된다는 겸손하고 소박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인간은 본성을 창조할 수 없어

   물론 그런 태도를 넘어 기독교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놀라운 답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랑일 것이다. 그런 답들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큼 국가나 사회 앞에서 그 책임이 무겁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