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분의 1시대’
<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김영란법 핑계로 獻身(헌신)을 獻心(헌심)으로 포장할까 염려돼”
초등학생들이 대형수족관을 견학하러 갔다. 투명한 수족관 속에서 스킨스쿠버가 송사리들에게 먹이를 뿌려주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한 아이가 소리쳤다. ‘야 뇌물 먹는다 뇌물.’
잠시 후 이번에는 스킨스쿠버가 큼직한 다랑어에게 먹이를 뿌렸다. 아이가 다시 소리쳤다. ‘떡값 먹는다 떡값.’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인솔 선생님이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 아빠가요 송사리가 먹는 것은 뇌물이고 큰 놈들이 먹는 것은 떡값이래요.’
사람은 누구나 선물받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받지 말아야 할 선물, 즉 댓가성인 뇌물이 있는가 하면, 받아서 가슴 뿌듯한 감동이 오는 감사의 선물이 있다. 그렇다면 뇌물과 선물의 구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주 어려운 걸 정부에서 법으로 정해주었다. 그것이 바로 청탁금지법이라는 김영란법이 아닌가. 식사 기준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 이상은 목적성이 있는 뇌물로 간주한다는 법이다. 가령, 3만 원이 넘는 식사대접을 받으면 과태료를 물게 된다. 그렇다면 김영란 법은 참 좋은 법일까?
먼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비약된 생각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부정청탁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모든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다. 비리의 시작은 미약하게 ‘밥 한 번 하시죠’ ‘제가 한 번 모실게요’ ‘필드에 한 번 나가시죠’에서 비롯되지만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하여 억억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부정청탁에 들어가는 비용은 고스란히 제품과 서비스의 가격인상이나 다양한 형태의 서민증세 등으로 국민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영란 법은 부패방지용으로 꼭 필요한 법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이 법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있다. 김영란법은 법이 아니라 칼이라는 말이 있다. 국민들이 살아가는 최소한의 의례를 막고 사제지간의 정, 이웃 간의 교류와 소통을 억지로 막는 법이라고 말을 한다. 더구나 삼시세끼를 집에서 혹은 도시락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서민에게는 거리가 먼 법이라는 지적이 있다. 따라서 김영란법은 이웃과의 아름다운 교제와 섬김, 감사와 겸양과 경애를 묶어버리는 마치 그 모습이 소의 부리망과 같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이 법을 살펴보자. 기독교문화의 특징 중 탁월성을 들자면 바로 공동체성과 헌신이다. 교회는 공동체성을 이웃과 ‘즐겨나눔’으로 표현했으며(행4:32-36), 헌신을 하나님께 ‘힘써드림’으로 실천하였다(고후8:2-4). 이 즐겨나눔과 힘써드림은 가난한 자나 부자 모두를 부요하게 하였다.
만일 김영란 법을 교회에 적용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아마도 이웃과의 ‘즐겨나눔’은 줄고 세속사회처럼 1/n, 더치페이, 혼밥문화 등이 일상 시 되지 않을까? 헌신에 있어서도 거액의 헌금을 드리는 ‘힘써드림’의 은혜는 사라지고 날마다 십시일반이라는 구호를 외치거나 작은 일에만 충성하자고 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마음을 전하는 구체적인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방법에는 말이나 혹은 선물 그리고 기타 감사의 행위가 있을 것이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하나님이시든 방법은 동일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자시니까.
그런데 만일 전하고 싶은 마음의 감동이 크다면 어쩔 것인가? 교회를, 성도를, 목회자를 무지 사랑하는데, 주님께 엄청 감사 하고픈데, 그때는 감동대로 크게 드림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법을 지켜야 하지만 그 법을 하나님나라에 그대로 적용하면 곤란할 것이다. 세상의 법과 문화를 빙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팔아먹을 수 없다. 김영란법을 핑계로 獻身(헌신)을 獻心(헌심)으로 포장할까 염려가 된다.
우리 주변에는 물질의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웃들이 있다. 구제헌금이나 선교헌금 그리고 장학헌금 봉투에 숫자 몇을 쓸 것인가? 3만, 5만, 10만? 이런 답을 기대해본다. ‘그건 제가 다 감당하겠습니다. n분의 m입니다(m=my).’
통큰 헌신은 하나님나라에서 불법이 아니고 적법이며 적극 권장할 만고불변의 도덕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