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가수 목사님에 대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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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목회자 한 분이 방송의 가요 경연장에서 “참말이야”라는 노래를 트로트 식으로 맛깔 나게 불렀다. 노래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심사위원의 요청으로 그는 축복 기도까지 했다. 복음이 담긴 그의 트로트를 들은 이들의 반응은 정말 대단했다. 세계 최초의 트로트 가수 목사의 출현을 알렸다. 하루 아침에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에 대한 논란이 목회자와 신자들 사이 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며 찬성하지만 심하게 반대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가 마음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가 목회자라면 이런저런 것을 다 생각하고 참가했을 것이다. 그가 불편을 느껴도 생각해 볼 점들이 있다. 그리고 싫든 좋든 그는 이미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가 한국 교회에 미칠 영향은 작지 않으리라! 그래서 더더욱 그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정통 찬송가와 복음 성가 사이 관계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찬송가는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 가요 식은 아니 되는가?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분명한 원칙은 있다. 찬송가는 예배 중 부르는 것으로 거룩성을 보여야 한다. 내용은 물론 리듬과 가락에서 예배의 찬송가들은 술집이나 바에서 부르는 유행가들과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들리는 가락이나 리듬으로 본다면 예배당인지 아니면 술집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예배도 거룩성 또는 구별성을 상실한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예배 중 찬송가는 거룩성을 띠어야 한다. 찬양을 받을 대상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양의 내용은 성경에서 나오며 신학적이다. 이 때문에 찬송가와 대중 가요 사이 작곡 동기와 목적 면에서 하늘과 땅 사이 만큼 차이가 난다. 대중 가요는 듣는 사람과 그의 감정을 고려한다. 가수나 청중의 감정선을 최대한 자극해서 기분을 끌어올리는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찬송가는 그런 작곡 기법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도록 유도하거나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도록 또는 신자의 마음을 주님께 기꺼이 헌신하도록 인도한다. 이 때문에 찬송가를 부를 때는 경건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대중 가요식 복음 성가를 부를 때 그만 몸이 들썩거리고 발을 구르게 된다. 대중 가요는 찬양의 대상과 내용보다 노래 부르는 자의 마음과 기분을 먼저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맞는다면 대중 가요식의 복음 성가는 예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흔히 대중 가요의 리듬과 가락은 반복적이며 지극히 자극적이다. 이 때문에 가사의 내용은 부르는 자나 듣는 자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리듬과 가락에 따라 몸을 맡기며 흥얼대게 되어있다. 이런 류의 복음 성가를 듣노라면 교회는 술집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대중 가요의 성격을 띤 복음 성가의 단점이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일반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나이든 장년 성도들을 위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뽕짝이나 트로트 식 복음 성가가 참으로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괘변이다.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룩하지 않은 수단과 방법도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 이런 식의 주장이 된다.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며 비상식적 주장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 양적 교회 성장론이 그렇게 주장한다. 알고 보면 공산주의자들도 그렇게 주장한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된다. 이런 주장은 상식적이지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다. 이런 마음 자세로 목회자가 성경의 내용을 트로트 식으로 작곡하여 직접 부른다해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목회자는 누구보다 먼저 성경 말씀에 준해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 앞에서 받겠다고 언급했다. 이것도 목회자가 해야 할 말은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다. 부활한 예수님이 세운 공교회의 충고나 권면을 전혀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교회를 위해 일하는 목회자 스스로 교회를 무너트리겠다는 것이다. 공인인 목회자는 말을 경솔하게 해선 안 된다. 만약 그가 자신의 입장을 계속 고집한다면 거룩한 목적을 위해 거룩하지 않은 방법과 수단도 얼마든지 동원될 수 있다고 신자들을 가르치는 식이 될 것이다. 정말 곤란하다.

그럼 다음 시편의 성구는 무엇을 뜻하는가?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시33:3절) 여기 ‘공교히’는 ‘모든 기술을 다해’란 뜻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또는 신자들이 온 마음을 다해 주를 앙망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찬양자나 청중의 기분을 한껏 흥분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공교히’라는 단어는 위에서 언급한 찬양의 목적을 충족시키도록 모든 고상한 작곡 방법을 동원하란 뜻이다. 이렇게 찬송가의 작곡 동기와 목적은 대중 가요의 그것들과 완전히 다르다. 인간에게 흥분과 감동을 주려는 동기와 목적을 띤 대중 가요식 복음 성가는 예배 찬송으론 정말 적합하지 않다. 히브리 인들의 전통적 찬양은 리듬과 가락에서 단순하다. 찬양의 가사 내용이 찬양자나 청중의 마음에 즉시 와 닿도록 말이다.

그러나 대중 가요 식의 찬송은 그렇지 못하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귀신을 초청하려는 무당은 계속 반복되는 강한 리듬과 빠른 템포에 맞춰 몰아지경에 이르려 한다. 그들의 음악은 주로 이런 목적을 띤다. 그리고 한국의 ‘한’ 문화에 따라 마음에 맺힌 한을 풀듯이 열심히 춤추고 노래한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는 무당의 초혼의식과는 완전히 다르고 찬양의 중심과 대상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리고 교회의 찬송은 예배 중 선포된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다. 말씀을 통해 전해진 진리가 머리와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다. 여기서 모든 치유가 가능하다. 그 결과 경건한 자세로 주를 찬양하게 된다. 물론 이를 위해 강대상의 설교가 살아 있어야 한다. 은혜로운 설교를 들은 청중은 저절로 주님을 찬양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교회 찬양의 성경적 원리이다. 말씀이 찬양의 원인이라면 찬양은 말씀의 반응으로써 결과이다. 그러나 이교도들의 제사에선 노래와 춤이 먼저이다. 반복되는 리듬과 자극적 가락에 맞춰 춤 춘다. 그들에겐 진리를 전할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여 흥분을 유도해야 한다. 즉 감정적 카타르시스가 제일 중요하다. 이것이 이교와 기독교 예배 사이 차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핀다면 교회가 대중가요 식의 찬송가나 복음 성가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목적을 들먹이며 수단을 정당화시키려는 주장은 지극히 성경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더더구나 이교도들이 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교회와 예배는 거룩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거룩성을 포기하려는 자세는 자신의 구원을 값싸게 취급하는 것과 같다. 목회자와 성도는 이런 자세를 버려야 한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존재로 본다면 말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9556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