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풍경화
<이강숙 집사, 열린교회>
“어려운 이웃을 만나거나 돕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지고 자신을 돌아다보게 되는 것은 어릴 적 큰아버님이 주신 교훈 때문”
노을이 붉게 물드는 저녁이 되면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찾아가던 시골집이 생각난다.
서울에 살던 나는 방학 때마다 할머니 댁을 찾아가곤 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근교의 할머니 댁은 덜컹거리는 시외버스를 2시간 정도 타고 종점에서 내려서 또 마을까지 십여 리를 걸어야 했다. 지금은 자가용이 많아 손쉽게 다녀올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시내버스를 타고 또 시외버스를 타고 그리고 또 걸어야 갈 수 있었다.
그 시골길을 걷다보면 여름엔 노오란 참외가 열린 참외밭을 지나고 여기저기 질퍽하니 깨져 벌겋게 나뒹구는 수박밭을 지난다. 참외 서리와 수박 서리가 흔하던 그 시절에는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원두막을 시원하게 지어놓고 매미소리와 여치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즐기시는 이웃집 아저씨를 보기도 했다.
훌쩍 키가 큰 옥수수는 수술을 흐드러지게 늘어뜨리고 옥수수 꽃을 바라보며 서로 사랑하는 눈길로 한여름을 보내고, 그 결실로 노랗게 영근 옥수수는 나의 간식거리가 되곤 했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새끼 꼬는 재료인 짚을 쌓아둔 볏가리가 하늘높이 서 있었고 나즈막한 담장 넘어 덜컹 탁, 덜컹 탁 노래 소리는 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짜는 소리였다. 요즘이야 비닐로 견고하게 만든 포대가 인기가 있지만 그때만 해도 짚으로 만든 가마니가 최고의 자루였다. 물론 조금만 움직이면 쌀이 빠져 나오기 일수였지만 그 가마니 짜는 일, 새끼 꼬기는 농한기인 겨울에는 유일한 일거리였다.
겨울이 되면 한강을 끼고 있는 할머니 댁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야 했다. 여름철에는 여유로의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가끔은 나룻배가 건너가는 동안 배 안에 있는 물을 바가지로 퍼내며 가기도 했다.
겨울에는 나룻배가 꽁꽁 얼어 있어서 사람들은 걸어서 강을 건너야 했다. 그러나 겨울 강을 건너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얼음의 두께가 고르지 못해 잘못하면 빠지기 쉬워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긴 작대기로 먼발치를 먼저 뚜드려 보고 확인하며 건너는 방법이었다. 혹독하게 추운 날이면 얼음장에서 호령하는 소리가 찌렁찌렁 울음을 토해내기도 했다.
이렇게 힘들게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성황당 고목이 호화찬란한 끈으로 묶인 채 나를 반겼다. 이 마을에 평안과 안위 그리고 소망을 담아 놓았을 정성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하얀 얼굴에 체크무늬 원피스와 흰 블라우스를 입고 두꺼운 스웨터로 감싼 모습을 구경하러 나온 동네 개구쟁이 친구들이 어디서 알고 왔는지 여럿이 모여 반겨 주곤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동네 뒷산에 올라서서 보면 강이 훤히 보여서 마을에 누가 오는지를 미리 알 수 있었다. 나도 어느새 여름철엔 시원한 강을 내려다보면서 나룻배가 떠다니는 모습을 좋아하게 되었다.
성황당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가게가 딸려 있는 기와집은 그곳에서 터를 닦고 산지 무척 오래된 부잣집임을 알려 주었다. 지금도 소슬대문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작은 가게는 간단한 의약품도 팔고 담배도 팔고 문구류도 파는 일종의 슈퍼였다.
그 옆에 작은 초가집이 여러 채 있었고 할머니 댁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 옆에는 냇가가 있었다. 그 냇가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중 어떤 돌다리는 중심이 잘 잡혀있질 않아서인지 징검다리를 건너다 빠지기 일쑤였다.
여름마다 이곳에서 친구들과 물고기 잡기를 자주 했는데 홍수가 나면 어김없이 신발 하나를 떠내려 보내 어린 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일을 당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날 데리러 오시면서 아예 여분의 신발을 하나 더 사 가지고 오시곤 했다.
이윽고 할머니 댁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외양간이 있는데 내가 눈이 커서 큰아버지는 그 황소를 가리키며 내 친구라고 하셨다. 그래서 난 할머니 댁에 가면 먼저 소를 보며 인사를 나누곤 했다. 지난 방학에는 어린 소였는데 어느새 많이 자라 어른 소가 되어 있기도 했다.
여름철 마당에는 의례 멍석이 펼쳐져 있었다. 여름밤 찐 감자에 옥수수를 바구니에 듬뿍 담아 한 켠에 놓아두고 모깃불을 피워놓은 마당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많은 신들의 별들을 찾으면서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먹었던 감자와 옥수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멍석이었다. 그 옛날에는 멍석말이를 해서 곤장을 치기도 했다고도 한다.
시골의 저녁은 참 일찍 찾아왔다. 높은 산이 있어서인지 어느새 놀다보면 어두워져 아이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 동생을 돌보기도 하고 엄마를 도와 밥을 짓는 아이들도 있었다. 할머니 댁은 다른 집에 비해 높아서 이 집 저 집에서 굴뚝마다 연기가 나는 것이 보였다.
어느 날 큰아버님과 함께 앞마당에 나와 여물을 썰고 계시는 걸 돕고 있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른 집들은 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데 몇 집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궁금한 나머지 큰아버님께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큰아버님은 “날 따라 오너라” 하시며 쌀뒤주로 가셔서 바가지에 쌀을 담아주시며 서너 집 중에 한집을 가리키시며 갖다 주고 오라고 하셨다. 얼른 빠른 걸음으로 그 집에 가져다 드리니 아주머니는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시는 것이었다. 돌아와서 어떻게 아셨느냐고 물으니 양식이 없으니 불을 땔 일이 없지 않느냐고 하셨다. 그러시더니 또 한 번 쌀을 담아주시면서 다른 집을 일러주셨는데 그 집은 연기가 나는데도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너무 궁금했지만 일단 심부름을 먼저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되물으니 말씀하시기를 검은 연기가 아닌 회색 연기는 연기가 나지 않으면 양식이 없는 것을 알게 되니 체면상 그저 군불만 때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세상살이가 다 그리 쉽지는 않다고 하셨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살아가기가 힘든 세월이었으니 어린 나이에 그 말의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이웃을 돌봐주시는 큰아버님이 존경스러웠다. 비록 작은 사랑이지만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이제 나이가 들어 어려운 이웃을 만나거나 이웃을 돕는데 앞장서시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지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것은 어린 시절 큰아버님의 작은 교훈이 나를 성숙하고 넉넉하게 만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고향 산에 평안히 잠들어 계시는 인정 많으신 할머님과 나에게 사랑을 듬뿍 안겨주신 큰아버님, 고향은 수몰되어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그러나 내 마음에는 언제나 살아있는 나침반이 되어 주고 있다.
여전히 병풍처럼 붉게 물드는 노을이 걸려 있을 그 산마루가 그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