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창조 질서와 자연이 주는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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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질서와 자연이 주는 복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자연을 통해 창조자 하나님의 품성들을 더 잘 이해하고 감사해야

 

 

성경에 따르면, 사람을 창조하신 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아래 우리로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역시 같은 단수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아래 성부, 성자, 성령이 인간들 사이에 언어들의 배경이 되는 구음의 통일성을 깨셨다는 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인간들 사이에 소통이 되려면, 서로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의지의 뜻을 전달하는 내적인 소리들이 먼저 있고 인간의 구강 구조가 갖는 특별한 소리 표현의 방식들과 그 능력에 따라서 구음들이 발생하는데, 그 구음들에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 어떤 통일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특별하다. 인간 언어의 현상들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무엇을 표현해 내는데 있어서 구음들의 분할 현상, 즉 문법화 현상이다.

다른 동물들이 인간의 구강과 다른 기관들을 통해서 인간 구음들과 같은 소리를 내고 혹은 인간의 분할된 구음들의 차이를 듣고 그 뜻을 읽어내는 일들을 직관적으로 따라서 행하는 일이 가능하더라도, 문법적으로 분할하여 구음들의 일치를 흉내 내는 일은 일부 새들에게만 제한이 되어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Science, 14 August 2015, 688-689). 그런 구음능력이나 언어 능력은 처음부터 침팬지를 포함한 원숭이들에게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인간들의 경우, 구강의 움직임에 의해서 구음으로 소리를 내기 전에 입가에 암묵적으로 같은 소리들을 내고자 하는 준비 혹은 암묵적으로 속에서 소리를 내어보는 것과 같은 내적 구음으로 거리를 갖는 행위들이 길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의 경우에도 행동으로 표현하기 전에 거리를 갖는 내적인 다양한 과정과 행위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밖으로 반응이 나타나기 전에 내적으로 소리의 문법화 현상들에 의해서 거리를 갖는 행위들이 있다는 것이 독특하다는 것이다.

아마 성경의 그런 구음과 언어의 일치성은 속으로 소리하는 독특한 행위들을 포함하여 실제적으로 밖으로 구음을 내는 방식들에 있어서 분할된 개념들에 있어서나 어떤 질서로서 문법화를 이루어 전달하는데 있어서도 어떤 통일성이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시점을 계기로 해서 인간들 사이에 구음들의 차이로 인하여 서로간의 각 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이 생겼다는 것은 인간에게 내린 하나님의 외형적 형벌로써 전 인류가 깊게 성찰하여 극복해야 할 큰 과제로 있다는 말이 된다.

성경에 따르면, 그런 피할 수 없는 형벌로 인한 큰 과제를 극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깊게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된 근본과 우리 세계 밖에 다른 세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인간 안에 영혼과 육체의 분리 이전에 인간 안에 들어온 더 큰 고통에 대한 문제, 그리고 자연 현상과 분리될 수 없는 노동에 대한 문제들은 깊게 성찰하여 극복해야 할 인간세계의 근본적인 과제들로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 간에 혹은 집단들 사이에 소외되고 피해를 입은 자들의 소리나 그 뿌리 그리고 저 성장의 시대를 알리는 지표들에 대한 성찰에 앞서, 더 깊게 근원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열과 고통 및 죽음의 원인들에 대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신앙과 삶의 규범이 되기 이전에 이미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그 제목 자체로부터 하나님의 말씀들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과 함께 하나님께 돌아오고 자연이 주는 복을 누리되, 인간 소외의 피할 수 없는 그 원인과 근본을 이해하고 다른 세계들과 함께 푸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로 인간 안에 원치 않게 들어온 고통과 고뇌, 노동과 죽음의 슬픔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 중심에 있다.

이미 온 세계에 대한 복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데에 있다면, 인간들에게 근원적으로 울 필요가 없고 슬퍼할 이유가 없다. 자연 안에 꽃과 열매를 보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웃음소리 자체나 그 기원과 근원에 대해서 깊게 관찰하지 않고 인간들이 이룬 성취들만을 보며 자연 질서의 근원 속에 근원적 입자 세계의 뒤얽힘(Entanglement)만을 본다면, 거기에 여전히 진정한 소외와 고통 그리고 슬픔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 세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 세계의 모든 종들을 보존하고 처음 있는 대로 잘 가꾸며 우주를 탐험하되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를 찾아보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우리 주변의 빈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안에 산소가 어떻게 생명들의 에너지원이 되며 빛은 세계 안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깊게 깨달아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이용하거나 혹은 미래 개인용 드론 자동차를 타고 이곳 저곳을 이동하기 전에, 먼저 동물들이 어떻게 초원에서 달리고 어떻게 공중의 새들이 창공을 날 수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더 잘 이해함으로써 창조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그 주신 자와 그 품성들을 더 잘 이해하며 그에게만 감사해야 내용들을 찾아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있는 행복은 어느 때보다 더 빠르고 혹은 그 반대로 더 느리게 살면서 더 좋은 삶의 질을 추구하고 서로를 기쁘게 하는데 있는 것보다 자연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 하나님께 돌려야 할 무엇을 얼마나 깊게 상상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쉽게 빠지고 즐기는 색들이나 소리들에 대해서 그 관계를 차디찬 파장과 같은 운동으로 상상해 본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눈과 귀가 다르듯이 그런 상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수많은 성질들(qualities)과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바로 직관하여도 거의 대부분 우리의 상상력으로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력, 전기력 혹은 광자들의 운동들과 그런 것들의 상호 관계를 차원이 다른 관계로 잘 이해하는 것 같지만, 아직도 검증해야 할 내용들이 너무 많다. 자연의 어떤 세계도 우리의 상상의 대상들이 될 수 없는 그런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는 아마 기술로 재현해 보는 것에 의해서도 아닌, 자연 자체 안에 그렇게 나타남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세계는 하나님이 처음 만드시고 자라게 하시며 간섭하시고 그가 친히 일하시는 일터로서 그리고 지금도 지어져 가는 건물로서 하나님 겉에 있는 세계라고 해야 될 것이다.

아마 그런 마지막 이해 속에 세계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이 있다고 본다면, 인간은 이미 누구나 행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