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개혁파 신학자들이 칭의와 성화를 나눈 것은 세미펠라기안 때문”
개혁파 신학자들은 칭의를 이해할 때, 하나의 칭의를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라는 두 국면으로 이해했다.
원래 칭의는 법정적이며 객관적이며 즉각적 성격을, 성화는 실제적이며 주관적이며 점진적 성격을 갖는다. 우리가 오해하기 쉽지만 칭의는 사실 우리 의식의 국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서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내면적 체험과 확신의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는 이런 국면을 설명한 것이다. 사실상 이 사건은 우리의 경험 내의 사건이 전혀 아니지만 회심을 할 때, 신자들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구원의 확신 등에서 자신이 의롭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국면을 우리 양심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칭의, 곧 수동적 칭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동적 칭의라는 개념은 칭의의 개념이지만 사실상 이는 성화의 영역이다. 그래서 존 머레이는 이 국면을 ‘결정적 성화’라고 표현했다. 성화가 가지는 점진적 성격과는 달리 이를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성화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우리 인식과는 무관한 사건임에도 거듭난 신자는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게 되는데, 이 국면을 수동적 칭의로 이해한 것이다.
즉, 우리 양심의 법정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 의식에 인식되었기 때문에 수동적이라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는 여전히 법정적이며 객관적 사건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능동적 칭의의 실천적 유익 중 하나가 구원 문제로 불안해하는 성도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드는 것은 이 사건이 우리의 변덕스런 경향에 달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과 그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신자들의 실제 신앙생활에도 그런가하는 의문이 든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장로교회들이 사실상 이 확신을 과도하게 남용하고 있다는 점과 그 극단이 구원파적 사고라는 점을 돌아보면 능동적 칭의에 대한 단순한 강조가 실제적으로 이런 실천적 유익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것이 정말 제대로 실천적 유익이 되려면 이런 구조를 가져야 한다. 곧 능동적 칭의에서는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로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의에 속한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단지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이것이 실천적 유익이 될 수 없다.
칭의가 우리 심령에서 인식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인식의 수단이자 그리스도와 연합의 도구로 알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칭의를 인식함과 확신은 결국 성화의 열매들에 의해서 방증될 뿐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 전통적으로 개혁파 신학자들이 칭의와 성화를 나눈 것은 세미펠라기안 때문이었다. ‘의의 주입’이라는 교리를 극도로 싫어했고, 그 의로 우리가 선행을 하고 그 행위로 종국에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는 우리 행위 개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려는 신학적 장치인 것이다. 그래서 칭의는 법정적인 성격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구원파적 사고와 구원에 대한 확신의 남발 및 거기서 비롯된 도덕적 타락과 해이는 이 능동적 칭의가 어떻게 우리 심령에서 확인되는가 하는 점을 간과해왔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칭의와 성화를 잘 구분하되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곧 칭의(능동적 칭의)-믿음-결정적 성화(수동적 칭의)-점진적 성화라는 구도가 가장 성도들이 오해 없이 이해하기 좋은 구조다. 이런 점에서 패더럴 비전(FV)이나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의 등장은 능동적 칭의에 대한 강조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능동적 칭의를 느슨하게 강조해온 것이 불러온 참사라 할 것이다.
교회에 등록하면 제자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복음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곧바로 구원의 확신으로 넘어간다. 그 확신은 대게 칭의의 법정적 성격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단독적 사역이라는 강조점으로 이뤄져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사 그리스도인이 양산되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도덕적 해이는 이제 거의 붕괴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이 칭의에 대한 유보적 시각을 역사 속에서 다시 불러내었다. 그리고 이렇게 유보된 칭의는 믿음과 성령에 의한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행위를 칭의의 영역에 불러들인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패더럴 비전(FV)이나 바울에 관한 새관점(NPP)은 그냥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장로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잘못 가르친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칭의의 법정적 성격은 계속 고수되어야 한다. 이 칭의가 우리 안에서 확인되는 지점은 성화의 영역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되 분리하지 말아야 하는 지점이 여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