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교직자 수양회 특집 <마지막회>| 우리의 위로_김병훈 교수

0
940

우리의 위로 딤후 4:6-8

< 김병훈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며 디모데에게 설교 사역을 간절히 부탁하고 권면하고 명령을 합니다.

앞서 1절에서 바울은 설교 사역을 지상 최대의 지엄한 기준으로 디모데에게 명하였습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이 명령은 어떤 조건을 들어 순종여부를 결정하거나 불순종을 핑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쓸 일이요”(2절), 또한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사욕을 따르며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 것이지만”(3-4절) 해야 할 일이며, 또한 “고난을 받아도”(5절) 해야 할 일입니다.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하되 신중함으로”(2절) 할 것이로되, “경책하여” 죄를 들어내고, “경계하여” 죄를 꾸짖으라(2절)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으로 부드럽게 돌보며 이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1. 임박한 죽음과 당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설교 사역을 명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설교 사역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교 사역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전하는 바울 자신의 실존 상황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고 말합니다.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예견하고 전제애 빗대어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이제 곧 죽을 날이 가까이 왔구나! 그런즉 네가 나의 말씀 사역을 이어야겠구나. 디모데야 두려워 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

이것은 일찍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다윗이 솔로몬에게 당부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네 앞에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신 31:7-8).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까닭은 다름 아니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윗은 솔로몬에게 명하기를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2-3)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동일한 명령과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며, 지키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행하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회고와 소망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는 말은 이제 닻을 올리고 출항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떠난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바다를 향해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출발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생애를 마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간다는 희망이 앞에 있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곧 임박한 순교의 때를 당하게 되는 지금에 이르러,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하면서, 자신이 걸어온 나그네 신앙 여정의 요약을 제시합니다.

먼저는 과거를 돌아보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7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선한 일을 위하여 싸워왔고, 또한 싸움을 굴하지 않고 잘 싸워냈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이 달려가야 할 모든 길을 다 마쳤다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말하는 바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것은 주 예수께 받은 진리의 복음을 잘 보호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의 약속을 믿고 사역을 감당했다는 뜻합니다.

바울 자신이 이 모든 싸움을 감당하고, 경주를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온 전적인 신뢰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지 않았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력하지 않았을 것이며, 주님 앞에 서는 날에 받을 상을 기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미래의 소망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이제 후로는 자신을 위하여 예비된 의의 면류관”(8절)을 바라본다고 말합니다. 그의 과거와 미래가 서로 분리되거나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과거는 바로 미래의 소망으로 인하여 빚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는 것은 과거에 수고한 자신의 노력을 대가로 공로를 바라며 주장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인하여 수고를 다 한 후에,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주신 신실하신 약속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상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확신은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기 때문이며 또한 재판장의 의로움을 믿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가 주실 의의 면류관이란 영원한 생명이며(딤전 6:11-12), 생명의 면류관이고(약 1:9-12; 계 2:10),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후 9:25)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서 우리는 바울 사도와 동일한 내용의 교훈을 듣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 장막을 벗을”(벧후 1:14) 임박하였을 때, 그의 교회에 유언처럼 남기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베드로 사도는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기를 원하는 교훈”(12절)이며,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바로 그 교훈”(13절)이며,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 생각나게 하기를 힘써 원하는 교훈”(15절)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절박하게 간절히 당부를 합니까? 그 답은 11절에서 확인이 됩니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날에 들어감”입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의 인생과 사역은 한 구절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빌 3:14) 인생입니다. 이들이 바라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 날에 받을 칭찬이었습니다(고후 5:8-10).

  1. 믿음의 사람들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갖는 소망입니다(딤후 4:8b).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특이하게 볼 것 없습니다. 누구나 죽으니,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만날 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즉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몇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노아는 왜 방주를 만들었습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일에 경고를 받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7절).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획하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입니다(10절).

아브라함은 왜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까?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고 알았기 때문입니다(19절).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그 약속을 지키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을 받기를 애굽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기보다 더 좋아한 까닭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26절).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까닭은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수 2:11). 히브리서는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손꼽자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히 11:32).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끌어 오신 믿음의 사람들, 그들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정리하여 답을 줍니다. 히브리서 11장 13-16절이 그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러하므로 어찌하겠습니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히 12:1-2)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1. 결론: 우리의 위로는 하늘 본향

 

결국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의 원인을 성질에 따라 분류할 때, 소위 목적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의 원인을 분별할 때 그 일을 행한 목적이 벌어진 일의 원인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여행에 빗댈 때, 목적지에 의하여 모든 여행 경로와 방편 등이 결정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수련회 장소에 오면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가시는 분은 안 게실 것입니다. 목적지는 비록 시간적으로는 제일 나중에 나타나는 일이지만, 그 끝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다 지배하고 결정을 짓는 우선성을 갖습니다. 논리적으로 가장 우선하며, 모든 과정의 가치를 결정짓습니다.

소련에 끌려간 고려인들은 한국 방송을 들으며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랜다고 방송에서 들었습니다. 해외 동포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갈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며 삽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주파수는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익히고 그것에 따라 살아갑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외인이요 나그네로 사는 이 세상에 하늘 본향의 소식을 들려주는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풀어 설교하는 일이며, 신앙고백서과 요리문답으로 가르쳐서, 잡음이 없이 깨끗하며 순수한 말씀을 듣도록 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열면 하나님 나라가 보이고, 성경을 덮으면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무엇을 설교 하여야 하겠습니까?

 

마치는 말

 

여러분이 임종을 할 때 자신의 사역이 무엇으로 요약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주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며, 믿음을 따라 사역을 하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정리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까? 임종을 맞이하는 날에는 드러납니다. 그가 복음을 따라 살고 죽은 자인가 그렇지 않은 자인가는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바울 사도의 고백과 유언을 들은 것이며, 또한 베드로 사도의 고백과 유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부족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암 박윤선 박사님이 계시고, 또 가장 최근에는 신복윤 교수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도 곧 그 행렬에 합류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족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 여러분의 묘비에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간 성도 나그네 아무개”라고 기록되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목회란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살면서 예수를 증언하고 성도들이 이 행렬에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경주할 수 있도록 전도하고 이를 가르치며 일깨워 세워가는 헌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그리스도를 배우며 사랑하는 교회, 이 땅의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시고 약속된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