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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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

 

 

‘상식’(common sense)이란 보편타당성(普遍妥當性)에 근거한다. 그래서 개인주의와 그에 따른 주관주의를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사회에서는 상식이라는 말이 점차 퇴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논리상으로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적인 특성보다는 개인주의적인 특성이 더욱 강해진 현대의 기독교에서도 정작 ‘은혜’라는 말이 점차 퇴화되고 있다. 왜냐하면 은혜라는 말은 기독교에서는 보편타당한 상식의 용어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은혜라는 말과 상식이라는 말은 굳이 구분하여 사용할 용어가 아니다. 흔히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용례와 같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상식과 특별한 개념으로서의 은혜 혹은 은총은 분명히 선을 그어 각각 구분되어 병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섭(Consilience) 가운데서 구별하기만 할 뿐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적 현실 가운데서는 은혜라는 말이 상당히 모순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보편적이면서도, 그 말을 쓸 때에는 항상 특별하고 비상식적인 어떤 일이나 사건을 가르키는 것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용어 구별에서 알 수 있듯이, 은혜는 특별한 일들이나 사건의 개념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들이나 사건의 개념이 훨씬 많은 분량과 빈도를 차지하는 점에서 아주 보편적인 말인데도 불과하고 이를 이해하는 가운데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를 확대하여 적용해 보면, 상식이라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계약으로 인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인해 성립해 있는 것이다.

항상 가까운 원인밖에는 보지 못하는 인간의 눈에는 모든 상식들이나 질서, 곧 사회적 질서들이 인간 사이의 계약으로 성립한 것으로 보이지만, 먼 원인이자 근본적인 원인에서는 항상 은혜로서 끊임없이 부여되고 공급되어 넘쳐흐르고 있는 것이 바로 상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은 피조물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은혜와 상식 혹은 보편성은 결코 각각 떨어져 성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같은 한 개념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구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더욱 보편적으로 적용해 보면, 결국 세상 가운데 있는 상식과 기독교 신앙의 은혜는 서로 별개로 추구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은혜라는 말이 조금 특별한 의미로 사용될지라도, 그것은 상식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상식을 넘어서는(Beyond) 말이다. 그런데 은혜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의 운영을 보면, 도처에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무시하는 그야말로 몰상식이 팽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적으로 교역자들의 사역(Work)은 엄연히 일(Work)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사역’이라는 말을 따로 선정해서 쓰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하는 일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특별함이란 헌신(self-sacrifice)이거나 은혜를 함축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 그 자체에 이미 은혜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 자체로도 우리들은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원리 가운데서 비로소 직업에 대한 소명(召命)이 성립한다. 따라서 교회의 운영이라고 해서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되며, 오히려 상식을 넘어서야 마땅하다.

간단히 말해서 세상의 복지 이론보다 교회의 복지가 훨씬 탁월해야 한다. 이는 의미상의 탁월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탁월해야 함을 가리킨다. 이러한 정신은 칭의(justification)의 근거 구절 가운데 하나인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이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롬 4:6절). 여기에서 세상보다 탁월한(Beyond) 기독교의 복지 개념을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을 무시하는 ‘은혜’로는 결코 상식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독교의 모습은 단언컨대 ‘몰상식’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몰상식해져만 가는 교회에 사람들이 갈수록 무관심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라 할 것이다.

‘상식’을 무시하는 ‘은혜’가 결코 상식을 뛰어넘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구별하되 통합하여 이해하되,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였던 것처럼 사회적인 상식과 특별한 은혜를 구별하되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는 탁월함을 지닌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으로서 보편적인 상식이 되도록 이기심을 버린 순수한 의미의 공동체성을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