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순수 이성보다 앞선 ‘자연’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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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이성보다 앞선 자연의 빛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

 

 

우리 앞에 있는 자연의 대상들 중에서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이라고 느끼거나 지칭하기에 너무 불편한 상황을 우리는 종종 만난다.

 

그 이유로서 자연 속에 자연과 너무 비슷한 인공물들이 많고 또한 그런 인공물이 자연에 잘 흡수되기도 하고 자연은 그런 인공물에 잘 적응하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합성이나 조작이 없는 자연에 대한 사진을 찾기 힘들 듯이, 인공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이제 극히 찾기 어렵게 되었다.

주는 자가 아무리 변치 않게 준다고 해도 받는 자가 늘 변하는 자로 받는 다면, 주는 대로 받는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가 계속 전달이 되고 발견이 된다고 해도 진리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진리가 항상 거기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기독교 진리도 모든 시대마다 그런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일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있는 영역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들이 축적이 되는 방향이 극 거시세계와 극 미시세계로 확대되면서 있는 그대로 ‘자연’ 혹은 진리를 발견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 지금까지 인간의 상상력으로 불가능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겨우 설명이 되고 진척이 되는 상황에 도달하였다.

지금 과학의 궁극적 과제들에 대해서 문제들을 풀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에 있어서 어떤 한계에 도달한 문제들이 대부분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유행하고 있는 상상력이 아직도 19세기 상상력에 기반을 두는 경우들이 많다.

극단의 예를 들자면, 어거스틴의 기억에 대한 상상력이 지금 컴퓨터 개념에 있어서 비트의 개념으로 남아 있는 이상, 지금 컴퓨터 공학이 어거스틴의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한 채로 계속 남아 있는 예가 그 대표적 예이다. 즉 현대의 많은 진리에 대한 진보나 영향력이 있는 내용들은 과거의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 상상력의 기준으로 보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대한 원초적 내용이 어거스틴의 개념론에서 찾을 수 있다든지, 훗설 이후 현대 실존주의들의 뿌리인 지향성의 개념도 어거스틴의 지향성 개념에 의존한다든지, 거부할 수 없는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사상의 원형도 창세기 3장의 인간의 타락상에 대한 뿌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 등이 다 그런 예들이다. 

 

지금도 어거스틴이 말한 생각의 마지막 경계선들, 즉 “질이 없는 선, 양이 없는 최대성, 부족함이 없는 창조자, 위치가 없는 좌정 자, 가진 것이 없이 만물을 포괄하는 자, 장소 없이 어디에서나 전체인 분, 시간이 없는 영원한 분, 어떤 움직임이 없이 움직이게 하는 자, 어떤 것에도 수동적이지 않는 자”로 표현된 그 상상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거나 그것을 띄어 넘는 상상력을 표현해 낼 수 없다는데 인간의 지성에 있어서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인간의 상상력은 그 끝에 도달하였다는데 문제가 있다.

인간의 상상력의 이런 끝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상상력의 한계의 그 극한점에 도달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대부분 필연적으로 인공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상상력의 부재와 함께 의식이 지향성이라는 의식 자체의 오류나 그 지향성이 판명성을 향하는 방향이 있다는 오류, 따라서 지향적 행위와 정반대인 우리 중심을 향하는 방향이 있다는 오류 등과 같은 오류들과 엮여 있는 모든 상상력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데 최대의 방해물로 있다고 해야 될 것이다.

우리 앞에 모든 대상들이 우리의 그런 상상력들에 의해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세계로 발견이 되면 될수록, 그런 상상력의 한계에 의해서 완전히 감추어진 채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창조자 하나님이 그런 인간 상상력에 의해서 표상되거나 발견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십계명만을 어기는 일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스스로 가장 자유롭게 하나님으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답으로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안에서만 세계의 문제들은 다 풀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한 번도 발견해 본 적이 없다는 말도 된다. 당연히 진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런 궁극적 인간 상상력의 부재 앞에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들에 대한 답으로 있듯이,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에게 나타내시는 방식인 계시가 유일한 답이요 인간이 그 계시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을 피조물들이 그 질서들에 대해서 듣고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듣고 보며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기 위해서 그 질서들이 처음 생기고 그 질서들이 존속하고 있는 비밀이 자연 속에 있다고 해야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 앞에 있는 자연을 처음 있는 그대로 인공적으로 인간이 완벽하게 만들 수 없는 동안, 이 결론은 인간에게 영원히 거부될 수 없는 진리로 남아 있다.

지금 자연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이런 진리를 느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