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들여다보기, 깊이 들여다보기_이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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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여다보기, 깊이 들여다보기

< 이영국 목사, 새론교회 >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엔 운명같은 만남들을 마주해야 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게 하고

추억과 욕망을 섞어

봄비를 내려 무뎌진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다.

망각의 눈으로 온 땅을 뒤덮고,

메마른 줄기로 자그마한 생명을 먹여살렸다.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소나기를 뿌리면서 슈타른베르거 호수를 넘어

우리는 주랑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햇빛을 받으며 계속 뜰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커피를 마시고,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4월이면 어김없이 되뇌게 되는 T.S 엘리엇의 시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 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추악한 추억과 인간의 욕정이 뒤섞인 결과물이라면 만물을 약동시키는 4월이 오히려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시리디 시린 겨울이라도 망각의 눈(forgetful snow)이 용서의 힘으로 대지를 감싸준다면 메마른 줄기에서나마 그 생명을 연명케 하기에 오히려 따스하였노라고 시인은 말한다.

여름의 녹음이 아무리 무성하여도 그 열매 없음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커피를 마시며 재잘거리는 수다소리가 거리에 넘쳐 나지만, 그것이 현대인의 어깨 위에 ‘원죄’처럼 짐 지워진 ‘고립과 단절’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에 시인의 눈은 이리도 정확히 계절을 비틀어 이야기하는가 보다.

1996년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일, 나에게는 결혼하기 좋은 날이었다. 가장 기뻐해야 할 결혼기념일이 4년마다 돌아오는 총선일과 겹치는 때면 봄날에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벚꽃길이 남발된 고성의 공약들로 혼탁하여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계절로 돌변하니 이 일을 어쩌란 말이냐?

벌써 두 해가 흘렀던가? 묻을래야 묻을 수 없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날, 4월 16일은 망각의 눈(forgetful snow)을 뚫고 쭈뼛이 고개를 쳐든다.

딸이 졸업한 ‘화성고’ 아이들이 제주도에서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아침, 딸과 같은 반에서 1년을 함께 공부하다 ‘단원고’로 전학 간 세영이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날이다. 세영이가 배 속에서 보냈다는 페이스북의 메시지가 아직도 선하다.

아랍인이 빼든 칼에 반사된 햇빛이 망막을 찔렀다는 이유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이방인 ‘뫼르소’의 상황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이 오히려 내 망막을 찔러댄다.

세영이의 시신이 수습되던 날, 영정사진 앞에서 하염없이 울던 딸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엘리엇의 말처럼 4월은 참 잔인하기도 하다.

 

그대가 기쁠 때 그대 가슴속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대에게 슬픔을 주었던 그것이 오늘 그대에게 기쁨을 주고 있음을 알리라.

 

그대가 슬플 때 그대 가슴속을 다시 들여다보라.

그대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그것으로 인하여 지금 그대가 울고 있음을 알리라.

 

레바논 청년 ‘칼릴 지브란’은 슬픔이 그냥 슬픔이 아니고, 기쁨이 그냥 기쁨이 아니라고 말한다. 슬픔도 기쁨도 깊이 들여다보고, 다시 들여다보면 희한한 화학 반응을 일으킨단다.

그래! 그렇긴 하다.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이 살만 하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노릇처럼, 또한 지금의 현실이 암울하다 하여 그 슬픔 속에 좌정해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살기 위해서라도 삶의 경황들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다시 들여다 볼 일이다.

신앙인에게는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엔 저어한 운명같은 만남들을 이미 준비하고 계신 분이 있지 않은가? 떨어진 꽃잎들 속에서도, 또 개화를 기다리는 봉우리들 속에서도 애써 그 분을 찾지 않으면 살기 힘든 계절이다.

정오의 태양빛보다 밝으신 분은 바울의 눈을 실명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봄, 갈라진 돌 틈 사이에 우리를 숨기시고 손으로 가리시며 뒷모습이라도 보이기 원하시는 그 분을 만나야 한다.

그래! 그 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숨 쉬기조차도 버거운 찬연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