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신 하나님
< 민현필 목사, 새순교회 >
“신앙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한 것”
최근에 필자가 살고 있는 집 옆 공터에 새 건물이 올라오고 있다. 이틀 정도 포클레인으로 터파기를 하더니 순식간에 철근과 콘크리트가 부어지고 이내 4주 정도 만에 벌써 4층 높이 정도로 올라왔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이러니 부실공사지. 아무리 빌라라도 이렇게 날림으로 지어도 되는 거야’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필자는 사실 건축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이 과정이 날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한 때 자취생활 하면서 살던 집 근처에 고급 빌라가 들어선 적이 있는데, 지하 주차 공간을 포함하긴 했지만, 그 기초 공사만 상당 시간이 걸린 것을 오며가며 지켜본 경험이 있다. 그러니 바로 코앞에서 이뤄지는 이 초스피드 공사가 괜스레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신앙생활도 기초 공사가 중요하다. 우리의 신앙을 ‘반석 위에 세운 견고한 집’처럼 세우기 위해서 반드시 잘 다져두어야 할 영역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주된 사역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자신의 <로마서 강해>(BST)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 중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고 그래서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하나님이 바로 ‘삼위일체로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에 있다. 근대적인 이성과 교육 환경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3=1’이라는 식의 도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또한 교의신학, 특히 신론을 다루는 교의신학 교과서들을 친절한 교사의 해설이 없이 혼자서 읽어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때문에 신학교를 졸업한 사역자들이라 할지라도 삼위일체론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가지고 졸업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졸업하고 시간되면 다시 공부해야지 하는 정도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리브스의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신앙의 핵심 요체인 삼위일체론이라는 ‘비옥한 땅’으로 인도해줄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감당하리라 생각한다.
마이클은 딱딱한 신학적 주제를 쉽게 설명하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이 책 역시 경건서적처럼 쉽게 읽히지만 깊고, 감미롭기 그지없다. ‘감미롭다’는 표현은 삼위일체론을 논할 땐 왠지 부적절한 어휘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저자에 의하면 신앙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한 것이며,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거하시지만, 그저 막연한 신비가 아니라 우리가 알아갈 수 있는 분이시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랑과 기쁨의 교제 속에 거하셨다. 그 하나님은 생명과 사랑을 한량없이 나누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부’이시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이유는 그분이 ‘성부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부의 정체성이다. 성부는 본성적으로 충만하시고, 흘러넘치시고, 아낌없이 나누어주시는 분이시다.
이 점에서 단일위격으로 존재하는 이슬람교의 ‘알라’는 ‘사랑하는 자’(알 와두드)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할 뿐, 기독교의 성부 하나님처럼 그 관심이 외부로 향하거나, 사랑이 흘러넘치는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알라는 비록 낙원을 제공할지라도, 피조물과 더불어 거기에 거하지는 않는다.
반면, 성부 하나님은 성자를 향한 그 사랑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창조는 성자를 향한 넘치는 사랑의 결과요 그 사랑의 샘의 넘쳐흐름이다(‘성자를 위한 성부의 선물’).
이 창조에는 값없이 주어진 것들과 필요이상의 풍성한 아름다움이 있고, 이로 인해 만개한 것들이 있으며, 그로 인한 기쁨을 통해 우리는 순전히 후하게 베푸시는 성부를 누릴 수 있다. 이처럼 천지창조는 ‘성부 하나님’의 성품에 완전히 부합된다. 또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천지창조의 논리이자 청사진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부 하나님의 성품에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역설 또한 존재한다. 다시 말해, 만약 하나님이 홀로 고독한 존재였다면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할 수 없다. 그러나 성부께서 성자와 더불어 항상 누려 오신 ‘사랑과 자유’를 나누기를 기뻐하시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생명과 인격’을 허용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등질 가능성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즉, 그분이 악을 만드신 분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거역할 자유를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부패한 우리의 심령에 새 마음을 주시고, 소경된 우리의 눈을 열어 진실하고 아름다우신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신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 생명은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분은 ‘어떤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셔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즐거워하도록 이끄시며, 그분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누리시는 교제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태양이 자연스럽게 그 빛과 온기로 우리를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 그분이 영원토록 누려 오신 행복을 주신다. 하나님을 성자를 우리에게 주시고 또한 성령을 주셔서 그렇게 하신다.
다소 반복적인 내용들이 긴장감과 간결한 맛을 떨어뜨리는 면은 있지만, 대체로 쉽고 감각적인 설명과 은유들이 가독성과 흡입력을 높여준다. 조나단 에드워즈나 존 파이퍼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공감하면서 읽을 만한 평이하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이 인상적인 책이다.
특히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삼위일체 신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갈리게” 됨을 역설한다. 또, 삼위일체론을 부록처럼 취급했던 신학사적 오류는 오늘날 ‘신무신론자’들의 약진에 상당한 원인이 되었음을 조심스럽게 지적하는 부분은 주목해 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