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시대 역사탐방<67>| 시나이 사본의 발견지 ‘카티리나 수도원’_장인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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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 사본의 발견지 ‘카티리나 수도원’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hanmail.net

I-88

세인트 카타리나 수도원(Deer Sant Kathlin) 전경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경 사본으로 학계에서 그 가치 인정해”

해발 2285m인 가바르무사(Gabal Muusa:모세의 산)를 오르기 전, 19세기부터 이 산을 오르는데 낙타를 타고 오르는 코스의 입구에는 세인트 카타리나 수도원(Deer Sant Kathlin)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수도원은 14세기경 일어난 지진으로 인하여 무너진 흔적 위에 다시 개축한 흔적이 남아 있지만 이슬람 혁명이 아랍지역을 휩쓸고 갈 때에도 파괴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보기 드문 일화를 남기고 있는 수도원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시내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카타리나 산(Gabal Kathlin)은 해발 2642m로 시나이 반도 최고봉이기도 하다. 이 산 아래 이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이 카타리나 수도원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모세의 흔적에 대한 설화 등을 기록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 사본 중 가장 권위가 있고 오래된 시나이 사본(Sinai Codex)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 사본을 발견한 사람은 독일 라이프찌히 대학의 교수인 콘스탄틴 폰 티센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 1815-1874)이다.

19세에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하였던 티센도르프는 신약 성경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보려고 하였으나 당시에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만으로는 많은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외국의 많은 권위 있는 도서관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지만 뚜렷한 사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외면당하고 있던 방치된 성서 사본들을 찾아나서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여행할 수 있는 재원 마련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하였던 대안이 독일 정부에 협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는 당시의 화폐 단위로 100탈러(Taler)를 지원하여 주기로 하였는데, 당시의 5탈러가 한 가족의 일주일에 해당하는 생계비였다.

당시 그는 만족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절약하면서 쓰기로 결심하고 드디어 1840년 파리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는 파리 국립 도서관을 방문하여 4세기경 시리아 교부였던 에프렘(Ephraem)의 설교문 사본을 발견하고 그의 사본을 세밀히 분석한 그는 언젠가는 무관심 속에 묻혀있을 고대 성경 필사본을 발굴할 수 있다는 결심을 굳게 한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귀중한 고대 필사본들은 그리스 정교회(the Greek orthodox Church)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리스나 이집트꼽틱, 아르메니아 수도원에 가면 희귀한 사본들이 잠자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기대를 안고 중동지역에 산재하여 있는 동방 정교회 수도원을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여행 도중 제롬(Jerom:일명 Hieronymus)이 번역한 불가타 성경(Vulgata)을 이태리 피렌체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다. 과거 제롬은 베들레헴의 한 지하 동굴(예수 탄생 교회)에 침거하면서 70인역(LXX)을 라틴어로 번역한 희귀한 사본이다. 이 사본 발견에 흥분한 티센도르프는 성경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중동지역의 첫 번째 방문지인 이집트를 향하여 1844년 4월 어느 날 출발했다.

그는 마그레브(Maghreb) 지역인 리비아, 중동의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등을 여행하고 시나이 반도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오래된 카타린 수도원을 찾게 되었다. 원래 이 수도원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s)가 이 지역을 순례하면서 모세의 시내산으로 전승되어 온 이곳에 수도원을 세울 것을 명한데서 그 기원을 잡는다. 그 후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Justinianus Ⅰ483-565)가 특별히 증축하여 오늘까지 그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전설적인 수도원이다.

이곳에 도착한 티센도르프는 1844년 5월 우연히 오래된 광주리 속에 낡은 양피지 가죽 두루마리가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에 있던 당시 수도사 얘기로는 이러한 양피지를 두 더미나 이미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놀란 티센도르프는 이 자료 가운데 자기가 찾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수도사는 “이 양피지 모두를 달라”고 요청하는 티센도르프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즉시 이 양피지 문서들이 귀중한 것임을 직감한 나머지 담아둔 양피지 가운데 43책만 건네준다. 받아든 티센도르프는 남은 양피지 책들을 잘 보관하라고 부탁한 다음 마음이 들뜬 나머지 이 넘겨받은 자료를 가지고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면서 남은 양피지 자료들은 넘겨받을 심산으로 간곡히 부탁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말 입수할 수 없게 된다면 필사라도 해서 오겠다고 결심을 하고 9년 만에 다시 수도원을 찾았다. 그러나 그 사본을 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묘안을 짠다.

그 수도원이 러시아 정교회 소속이었기에 당시 러시아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 후 드디어 1859년 당시의 황제였던 알렉산더 2세의 후원을 받아서 수도원을 찾게 된다.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경 사본을 마침내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는 1859년 러시아 황제의 후원 하에 이 두루마리 사본을 네 권의 성서로 출간하게 된다. 그러나 1930년 러시아 혁명 이후 이 사본에 관심이 없던 러시아는 대영 박물관에 10만 파운드에 팔아버렸다.

오늘날 이 시나이 사본은 신약 성경 사본 중 가장 권위 있는 사본으로 사본학에서는 널리 인정하고 있으며 대영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귀중한 사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