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적 합리성보다 더 큰 자연의 합리성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자연은 인간에게 창조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첫 번째 길잡이”
인간의 언어 소리는 노래할 때의 소리 내는 것과 다르다. 인간이 밖으로 말하는 것은 마치 이미 뇌의 깊은 곳으로부터 말하는 것이 발생하여 벌써 입가에 말들이 맴돌고 있다.
물론 노래하는 소리도 입가에 맴도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중요한 차이는 노래할 때 입가에 소리로서 맴도는 소리들은 감성을 실어 나르지 않는 소리이다.
그러나 뇌가 이상이 생겨서 전체적인 통제성의 상징인 의지와 상관없이 깊은 곳으로부터 감성을 실어 나르는 말소리가 발생하여 밖으로 소리를 내는 현상이 있는데, 그 소리 현상은 의지에 의해서 통제가 되지 않아 당황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생의 태도들이 야기되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깊은 뇌의 회로 중에서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는 감성을 실어 나르는 말소리와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말소리들은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상당히 부정적인 말소리들이 발생하는 현상이 있다.
그런 현상을 분명히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데, 시기에 따라 혹은 개인에 따라 그 효과가 다양하고 그 효과를 나타내는 기간이 짧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 약들은 그 효과보다 더 다른 현상들을 야기하는 부작용들이 더 큰 경우들이 많다. 이런 현상들을 가지고 고통하는 자들이 사회적으로 점점 많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게 심한 징후들로 발전이 되는 경우는 그렇게 치료할 수 있지만, 미묘하게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들은 그냥 구별됨이 없이 그리고 별 생각이 없이 사회 속에 섞여 살다가 어느 때에 갑자기 어떤 계기로 그러한지 자신도 모르게 그런 현상들이 발생하였을 때, 가족이나 사회나 아무도 막을 길이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쉽게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피해현상들에 대해서 미래 사회는 고민을 많이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좋은 사회와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일은 어마 어마한 과제들을 안고 있다. 법을 세우거나 법에 따라 판단할 때, 사회에서 소외될 수 있는 영역들을 모두 고려하여 가장 종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감성을 실어 나르고 합리성을 실어 나르는 언어현상이 있어 소통이 가능하고 스스로나 소통하는 사회로부터 치명적인 현상들이 회복도 될 수 있다. 그 만큼 언어 생활도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조심해야 할 영역이다.
물론 그런 내적인 인간의 소리 현상이 없이 인간에게 친근하고 적응이 되어 인간의 말들을 잘 이해하는 동물들에게도 우리 인간과 같은 구강 구조를 이식하여 말하는 일이 성공하였다고 할 때, 그렇게 동물들도 그런 감성을 실어 나르는 말들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우리 인간의 일상용어들은 영혼과 같은 인간 전체에 대한 이해 없이 모두 해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의 일상용어들은 우리의 감성만을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합리성도 실어 나르고 있다. 그런 합리적 언어 현상 때문에 글자들로 표현된 글쓰기에도 그런 합리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수학적 상징들이 표현하는 합리성과 비교할 때, 그 지향하는 형식주의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자연과 같은 현실과 수학적 합리성 사이에는 분명히 큰 괴리가 있다. 우리가 기하학적으로 그리는 선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적인 내용이 포함이 되어 일찍부터 허수를 가정하였고 당연히 그런 합리성을 가진 다른 기호들도 만들어 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라는 개념이 n(n+1) 분의 1이 무한대로 합해 질 때도 같은 수가 된다는 사실을 잘 풀지 못하고 있다. 4분의 1 또는 2분의 1 혹운 3분의 2 그리고 4분의 3 등도 그렇게 무한수로 표현이 되어도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선과 곡선의 관계를 상징하는 “파이“ 조차도 플러스 마이너스 2n-1 분의 1을 무한히 더하거나 뺀 수로 표현이 될 수 있어도 아직 기하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수학적 상징들의 비합리성은 미분의 합리성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원둘레 길이를 반지름 길이로 된 방정식으로 이해할 때, 그 방정식을 미분하면 반지름을 1로 하는 ’2파이‘가 그 합리성의 끝이다. 그러나 원의 넓이를 방정식으로 미분하면, 원 둘레 길이로 나와 분명히 어떤 합리성이 증명이 된다.
반면에 구체나 원통의 부피를 방정식으로 하여 미분하면, 그 미분 값은 원 넓이와 다른 표면넓이 값들을 가지므로 높은 차원들이 숨겨져 있는 경우 미분 방정식이 숨어있는 질서를 대표할 수 없게 된다. 소위 3차원 이상에 대해서 미분하면, 그것에 대응된 기하학적인 현실들은 전혀 다르게 이해해야 할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기하학적으로 혼돈이 예상이 되는 곳에 실제 그래픽의 경우에 질서를 생산해 낸다는 사실을 또 다른 합리성(emergency)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그런 합리성의 충돌이 실제 자연적 현실이나 가상적 현실에서 얼마나 큰 괴리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훨씬 깊게 땅 위에 나무들이 자라 퍼진다는 현상이나 태양 주위에 지구가 도는 궤적이 갖는 혼돈의 세계는 그런 괴리들이 충돌이 되는 합리성에 의해서 설명이 될 수 없는 ’자연‘이다. 그런 자연은 인간에게 그 인간들 파괴 마지막까지 무한히 도전을 제공하면서도 창조자 하나님을 아는 첫 길잡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자연으로부터 그 안에 있는 문제들을 쉽게 스스로 풀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 곳에 자신과 그 자연이 파괴되는 일만이 남기게 된다는 죽음의 원리가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