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그노 이야기 61
사선에 선 목회자: 파리 첫 교회 첫 목사 마쏭
[마쏭 목사의 파리 목사관. 조병수 촬영]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파리 첫 번째 교회의 첫 번째 목사는쟝 마쏭(Jean Le Maçon de Launay, 1533-1572)이다. 그는 별명으로 “리비 에르”(La Rivière)라고 불린다. 마쏭은 엉제(Angers)의 국정 법관의 아들이었 는데 파리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하는 동안 위그노 신앙을 받아들였고 제네바와 로잔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그는 젊은 학도였지만 확고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으로 돌이키려는 부친의 위협과 애원을 견뎌냈다. 마쏭이 프랑스로 되돌아갈 때쯤, 몇 사람이 그가 성찬을 받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마쏭의 부친이 강하게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혹시라도 부친의 강요를 따라 다시 가톨릭의 미신으로 더럽히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마쏭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더 힘든 싸움을 하려면 더 훌륭한 무기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당시 위그노들이 성찬을 신앙생 활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잘 보여준다.
마쏭이 목사로 부름 받은 사연은 이렇 다. 당시 파리 성벽 밖에 위치한 마래-생제르맹(Marais-Saint-Germain) 지역은 파리 대학의 관할과 수도원의 관할 사이에 걸쳐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감시가 심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마래 거리(현재 비스꽁띠 거리)에는 많은 위그노들이 정착해서 ‘작은 제네바’ 라고 불릴 정도였다. 말리니 영주이자 샤르뜨르 백작 페리에르(Ferrière)는 자기의 영지보다 이곳이 위그노 신앙을 지키 기에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가족과 함께 파리에 와서 정착하였다. 생제르맹데 쁘레 수도원의 지근거리에 있는 그의 집에서 개혁파 예배가 시작되었다. 위그노 들은 불법 비공식적인 모임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시편찬송을 불렀다.
페리에르 백작의 파리 정착은 1555년 초엽에 위그노들에게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머지않아 아기가 출생할 것을 기다리면서 동료 들에게 유아세례에 관해 자문을 구했다.
아기에게 가톨릭 영세 베풀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갓난아기를 데리고 제네바까지 먼 여행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제적인 필요성에 부딪힌 동료들은 교회 설립의 긴급성을 파악하고는 금식과 기도 끝에 첫 번째 개혁파 교회를 개척하여, 22세의 젊은 법학도 마쏭을 첫 번째 목사로 임명하였 다. 마쏭 목사는 제네바의 개혁파 방식을 따라 신생아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첫 번째 파리 교회의 첫 번째 목사로 임직한 마쏭이 가장 먼저 중점을 둔 것은 장로와 집사로 구성된 당회의 설립이 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보았던 방식을 따라 이 일을 추진하여 조직교회를 세웠다. 마쏭 목사는 파리에서 7년간 목회했 다. 그는 생제르맹데쁘레 수도원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포도원으로 둘러싸인 사택에서 살았다. 1555년에는 파리 교회에 목사가 마쏭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이듬해부터는 그와 함께 여러 동역자가 활동했다. 샹디외(Chandieu), 모렐(Morel), 말로라(Marlorat) 등으로 모두가 당시에 혁혁한 이름을 남긴 목회 자들이다.
마쏭은 1559년 5월 25일~29일에 파리에서 열린 제1차 위그노 총회에 참석 하였다. 총회는 비꽁뜨(Vicomte)라고 불리는 위그노가 소유한 여인숙에서 비밀리에 개최되었다(현재 비스꽁띠 거리 4번지). 72 조직 교회가 총대를 보냈다.
총회 의장은 제네바에서 2년을 보낸 후다시 프랑스로 귀환한 모렐 목사가 맡았 다. 총회는 신앙고백서와 교회치리서를 가결하였다. 조직교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회의를 갖추어야 하며, 목사는 개혁파 교회의 특징을 이루는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찬)를 집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마쏭 목사는 파리에서 7년 동안 목회한 후 고향 엉제(Angers)로 돌아가서 활동했다. 1572년 8월 24일에 파리에서 시작된 바뗄레미 대학살이 프랑스 전국 으로 확산하였을 때, 마쏭의 살해를 담당한 껑브 남작이 찾아왔다. 먼저 목사 부인을 만난 남작은 당시 관습대로 손에 입을 맞추고는 남편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정중하게 전했다. 마쏭 목사는 마침 정원을 가꾸는 중이었다. 백작은 목사와 포옹을 나누고 자신이 방문한 목적을 알렸다. 마쏭 목사는 잠시 기도를 드리고 나서 남작의 총탄 아래 스러졌다. 그의 나이 3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