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가 끝이 아니다: ‘인턴’처럼 다시 시작하는 사역의 길
최광희 목사/ 수원노회 행복한교회
정확히 10년 전이다. 영화 <인턴>이 개봉된 것은 2015년 9월이었다. 창업 1년 만에 성공 신화를 이룬 30세 여성 CEO는 인생 경험이 무기인 70세 남성을 인턴사원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그 인턴사원은 인생의 풍랑을 조용한 지혜로 이겨내며, 조직에 따뜻하고 깊은 변화를 가져온다. 경험은 퇴물이 아니라 보물이 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주었다. 10년 전 영화가,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에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이다. 노년층 인구는 급격히 늘고 있고, 기대수명은 과거보다 훨씬 길어졌다. 문제는 단지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은퇴자들은 과거의 노인들과는 달리, 정신적·육체적으로 여전히 건강하며 왕성한 활동력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노인 같지 않은 노인’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꾸준한 독서, 설교 준비, 기도 생활, 성도들과의 교류를 통해 마음과 정신을 날마다 단련해 온 은퇴 목회자들의 경우, 은퇴 후에도 충분히 사역을 감당할 만한 에너지와 지혜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현재 제도와 분위기는 그들을 ‘은퇴자’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사역의 자리에서 밀어낸다. 정년이 지나면 무조건 물러나는 구조는 한국교회가 한 세대 전부터 정착시켜 온 어떤 문화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그 틀도 재고할 때가 되었다. 은퇴한 목회자가 지닌 경륜과 성경 해석의 깊이와 인간 이해의 너비는 귀중한 자산이다. 그것을 그대로 묵히는 것은 개인적 손실을 넘어서, 교회와 사회 전체의 손실이다.
최근 들어 교단마다 정년 연장에 대한 논의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는 만만치 않은 반대도 존재한다. 교회 내 세대교체의 필요, 후임자에 대한 배려 등 여러 현실적 요소가 얽혀 있어 조율이 쉽지 않다. 결국 정년 연장은 쉽지 않은 문제이고, 그래서 우리는 더 건강한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 대안은 어쩌면 단순하다. 정년은 존중하되, 그 이후의 삶을 ‘전환의 시간’으로 여기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은퇴자다’라는 수동적 인식에서 벗어나, ‘나는 전환자다’라는 능동적 인식을 갖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Retired가 아니라 Rewired, 즉 다시 연결되고 다시 살아나는 사람이다. 이 같은 인식의 변화는 은퇴 이후의 삶 전체를 새롭게 조직하고 설계하는 데 핵심적인 전제가 된다.
이런 변화의 출발점은 자기를 내려놓는 데 있다. 과거 교회를 이끌던 리더였다는 자부심,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이 당연했던 시간을 잠시 내려놓고, 인턴사원처럼 섬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영화 <인턴>의 주인공 벤처럼, 자녀 같은 CEO를 섬기고, 불편한 것을 먼저 알아차려 해결하는 사람.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조직을 품격 있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느 교회의 부서 사역자로 ‘재취업’(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해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능하다면 본인이 몸담았던 교회의 노년부나 양육부서 등을 맡는 것이 가장 편할 것이다. 오랜 정서적 유대와 소속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임 목사의 부담을 고려해야 한다. 과거 담임이 여전히 교회에 남아 부서를 맡는 것은 자칫 보이지 않는 긴장과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더 지혜로운 길은, 자발적으로 더 작은 교회, 더 어려운 교회, 더 낮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자립 교회, 농어촌 교회, 장애인 교회 등 사역자의 손길이 절실한 곳에서 은퇴 목회자들이 ‘파트 사역자’로 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인의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길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도 큰 유익이 된다. 교회들이 은퇴자를 ‘지나간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걷는 사람’으로 바라봐 주는 시선도 필요하다.
한때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라면 한 그릇을 먹거나 햇살 좋은 날 공원 산책하는 일, 조그마한 물건 하나 구입하며 느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도 좋지만, 작은 교회 부서 하나를 맡아 조그마한 화분에 물을 주고 가꾸듯이 부서를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 그것이야말로 은퇴자에게 허락된 ‘거룩하고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은퇴는 끝이 아니다. 단지 섬기는 방식이 달라진 것일 뿐이다. 누군가의 위에 서는 위치는 내려놓았지만, 누군가의 곁에 함께 서는 동역자는 될 수 있다. ‘나는 전환자다’라는 고백으로, 오늘도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는 은퇴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보석처럼 빛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