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다른 복음은 무엇인가?
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과 맞서 싸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는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에 무엇을 덧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율법주의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있다. 팀 켈러는 오늘날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신앙인들이 문화를 통해 다양한 압박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다원주의는 신앙을 개인화 하고, 공공의 영역에서는 자신들과 동일한 세상의 문화를 가지라고 압박한다. 이런 다원주의의 압박으로부터 신앙을 고수하려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분별하며 바울처럼 우리도 저항해야 한다. 월터 브루그만은 <안식일은 저항이다>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은 애굽의 파라오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라고 설명한다.
“파라오의 시스템 안에서 안식일의 쉼은 있을 수 없다. 파라오가 생각하는 감독 기능에는 쉼이 없다. 매일 생산 스케줄을 감시한다.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피로한 시스템 속으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뚫고 들어오신다. 노예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 착취 시스템에서 해방시키시려고 모세를 부르셨다.”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은 결국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배제하고 보이고 검증 가능한 세계만 인정하기 때문에 자연주의 세계관은 결국 물질주의로 흐르게 된다. 물질주의, 자본주의, 소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성취와 돈, 즉 눈에 보이는 무엇을 구원의 단계로 격상시키며 산다.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도 이전에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시대였는데, 지금은 자신 스스로가 착취하는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구분되지 않기에 더욱 심각한 피로사회를 살게 된다고 경고했다. 왜 우리는 자기 스스로 착취하는 피로사회를 살고 있는가? 오늘날의 다른 복음, 오늘날의 율법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했던 구원에 무엇을 더해야 하는 율법주의는 오늘날엔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서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오려고 한다. 어느 사격 선수는 인터뷰에서 “남들이 150발 쏘면, 저는 300발, 500발 쏘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이런 인터뷰는 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라는 이름으로 전도되고 있다. 종교적 율법주의와 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사격할 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복음과 종교의 차이는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이다.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 당시에 뜨거웠던 신학적 논쟁의 핵심에는 칭의와 성화의 순서가 있었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게 되면 율법주의로 흐르게 된다. 칭의의 은혜가 성화의 동기가 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순서이다.
은혜가 노력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율법은 늘 나를 피로하게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은 자기혐오와 자기 정죄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복음은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는 선언이다.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다는 선언이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안정감 안에서 출발할 수 있게 한다. 다른 누군가보다 100발을 더 쏘아야 하는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가 동기가 되어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다. 열심이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지는 삶이다.
출애굽 당시에도 은혜의 구원이 있고 그 다음에 율법이 주어진다. 은혜와 율법과 순종과 축복이 신앙의 순서로 주어졌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열심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열심의 동기로 작용하게 한다. 결국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은 복음이다. 복음이 종교로 변질할 때 우리는 늘 안식이 없는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NKRV)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그 열심은 자신의 부족이나 결핍 때문이 아니라, 만족 즉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하는 능력주의자가 아니다. 이미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만족과 감사를 통해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가만히 들어온 다른 복음을 분별하며 바울처럼 싸워야 한다. 복음은 참된 자유 안에서 성화를 이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