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34] 광야집회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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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집회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의 권력을 거머쥔 이후 해외로 피난하지 못하고 프랑스에 남은 신교 신자들은 여러 모양새를 나타냈다. 달콤한 회유와 쓰라린 압박을 못 이긴 사람들은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낮에는 구교 신자로 살고 밤에는 신교 신자로 사는 이중생활로 만족하였다(이들은 ‘니고데모파’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얻었다). 많은 위그노들은 가정의 깊숙한 공간, 험한 산속의 동굴, 인적이 끊긴 황무지에서 비밀리에 모여 성경을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보통은 혼자 또는 몇몇이 함께 성경을 비롯하여 신앙문답서 등을 읽다가, 설교자가 오면 한적한 광야로 몰려가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비밀집회는 위그노들에게 고난과 박해를 견뎌내는 힘을 실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광야교회”의 시작이다. 낭뜨 철회로 말미암아 1685년과 1686년 사이에 전국의 모든 개혁파 교회당이 부서지는 가운데 네 곳의 교회당만이 간신히 파괴를 면하였다. 따라서 예배당을 잃어버린 위그노들은 전국적으로 비밀집회로 모였는데, 이런 현상은 특히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위그노들은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소수가 모일 때는 산속의 동굴에서, 다수가 모일 때는 광야의 노천에서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광야교회에는 프랑수와 비방(François Vivens)과 님(Nîmes)의 끌로드 브루쏭(Claude Brousson)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비방은 1692년 사형을 당하였고, 브루쏭은 1696년 교수형 후에 형차에서 신체가 찢기고 말았다. 낭뜨 철회 이후 박해의 시대를 견뎌내야 하는 위그노들은 독특한 위그노 십자가를 소지함으로써 강한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위그노 십자가는 1688년에 금세공사 매스트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야교회가 성장하면서 프랑스 위그노들은 망명지에서 목회자들이 돌아오기를 열망하였다. 하지만 그 기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광야교회는 자체적으로 안수한 목회자들을 망명지의 교회 지도자들이 합법적으로 인정해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망명지의 교회 지도자들은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어떤 저항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교회법적으로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심지어 열광주의 예언자로 의심받는) 평신도들의 목사안수를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1729년에 엉뚜완 꾸르가 스위스 로잔에 신학교를 세워 광야교회에 목사를 조달해줌으로써 비로소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타개되었다.

루이 14세의 사망(1715. 9. 1)을 며칠 앞둔 1715년 8월 21일, 몽떼즈에 있는 채석장의 한 오두막에서 다섯 명의 설교자와 네 명의 평신도로 구성된 첫 번째 “광야 노회”가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서 젊은 설교자였던 엉뚜완 꾸르가 의장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여기에 참석한 설교자들 가운데는 롤랑 그룹에 속한 까미자르 일원인 쟝 후끄가 있었고, 그 외에 쟝 베쏭과 마리 뒤랑의 오빠인 삐에르 뒤랑이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신교의 광야교회를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교회와 연결시켰다. 이것은 개혁파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노회였다.

그들은 광야교회를 위한 규정을 만들었다. 당회를 가진 조직교회를 설립하고, 성례와 혼인을 주관하는 설교자를 장립하며, 과거의 노회를 재건하고, 직통 계시와 영감과 예언 등의 열광주의를 거절하면서 예언자들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무력 저항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내린 가장 중요한 조처는 개혁파 교회에서 정한 장로 제도를 재도입하는 것이었다. 장로들은 집회를 준비하고,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여 설교자들을 그리로 인도할 안내자를 확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금하는 책임을 졌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목사로 장립된 삐에르 꼬르떼가 공식적으로 첫 번째 설교자로 임명되어 개혁파 교회의 재건의 초석을 놓았고, 꼬르떼는 지역노회에서 꾸르를 목사로 안수하여 광야교회의 지도력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