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함께: 낭뜨 칙령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
앙리4세가 공식적으로 위그노 신앙을 철회하고 가톨릭으로 돌아간 사건(1593년)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목숨을 걸고 지지하던 많은 위그노들에게 크나큰 분노를 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시인이자 군인이었고 문예가이자 정치가이었던 도비녜이다. 도비녜는 앙리4세의 변절에 통분을 금치 못하고 국정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는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하면서 문예활동에 여생을 바쳤다. 그러나 평생 동지인 쉴리 재상 같은 인물들은 끝까지 앙리4세의 곁을 지키면서 굵직한 나랏일 뿐 아니라 앙리4세의 시시콜콜한 가정사까지 보살피는 일을 해결하였다.
앙리4세는 위풍당당하게 파리로 입성한 후(1594년) 가톨릭 동맹을 지원하는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1595년). 3년에 걸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초기에는 앙리4세가 밀리는 듯하였지만, 쉴리 재상이 탁월한 전략을 발휘하여 마침내 프랑스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다(1598년). 국내의 가톨릭 잔여 세력까지 제압한 앙리4세는 스페인과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명실공히 왕권을 확립하고 국정을 장악하였다. 이것은 앙리4세가 1589년 8월 국왕으로 추대된 지 10년 만에 일구어낸 쾌거였다. 드디어 정치적 입김이 최고조에 달한 앙리4세 앞에는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피의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위그노들에게 보상해야 하는 과제가 떨어졌다. 1598년 4월, 앙리4세가 위그노들에게 보답으로 발표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낭뜨 칙령이다.
낭뜨 칙령은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92조항을 담은 본령, 첫째 특허장, 23조항으로 된 둘째 특허장, 그리고 56조항을 가진 특령이다. 낭뜨 칙령에는 교리나 신앙에 관한 언급이 없다. 위그노를 위한 양심의 자유와 예배의 자유를 요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낭뜨 칙령은 전년도까지 위그노가 우세하였던 도시와 마을, 이전 평화조약들에 언급된 지역들, 그리고 신교 귀족들이 다스리는 지역에 해당되었다. 위그노가 가톨릭교회에서 신교 예배를 드리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또한 파리와 가톨릭 지역에서는 신교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위그노가 장악한 지역에서는 예배당 건축과 설교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도 허락되었다. 교육받을 권리와 공직에 진출할 길도 열렸고, 법정에서 자기들의 권리를 보호해 줄 법관을 둘 수가 있었다.
특령에는 위그노에게 더 호의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위그노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당회, 시찰회, 노회와 총회를 열 수 있었다. 첫째, 특허장은 위그노들이 감당해야 할 여러 가지 경비를 매년 국가재정에서 지원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둘째 특허장은 위그노에게 150개의 안전지대를 보장한다고 약속하였고, 위그노 지역을 보호하는 수비대를 위해 8년 동안 큰 경비를 지원하기로 명시하였다.
하지만 낭뜨 칙령이 위그노들에게 긍정적인 의미만을 준 것은 아니다. 낭뜨 칙령이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밝은 면을 수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었다. 낭뜨 칙령은 새로운 전쟁을 촉발시킬 만큼 가톨릭 세력이 적개심을 품게 했다. 또한 낭뜨 칙령이 위그노 교회들에게 생존을 보장해 준 반면에, 위그노가 소수 집단임을 공식화한 것이 되고 말았다. 위그노가 양심과 예배의 자유를 보호받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복음 전도와 교회 확장에 대한 제한이었던 것이다. 만일에 낭뜨 칙령이 없었더라면 비록 위그노들이 계속해서 박해를 받았겠지만, 위그노 신앙은 프랑스의 전역에 더 빨리, 더 널리, 더 깊이 확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낭뜨 칙령이 모든 사람에게, 아마도 심지어 앙리4세 자신에게도 완전한 만족감을 주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낭뜨 칙령이 가져다준 위그노의 부분적 평화는 12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1610년 5월 14일, 앙리4세는 파리 한복판에서 가톨릭 열성분자의 단검에 찔려 숨졌다. 앙리4세는 가톨릭 왕비로 맞이한 까닭에 자녀에게 위그노 신앙을 물려주지 못했다. 가톨릭 신앙이 몸에 밴 아들 루이13세가 왕위를 물려받음으로써 위그노들에게는 다시 어둡고 차가운 미래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