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4] 사건과 함께: 제1차 위그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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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제1차 위그노 전쟁

 

바씨 학살 소식을 들은 위그노들의 격분을 대변하듯이, 정치적 지도자 가운데 꽁데 왕자가 오를레앙을 점령함으로써 36년 동안 여덟 번 벌어질 위그노 전쟁의 신호탄을 올렸다(1562.4.2.). 꽁데는 저항의 정당성을 강력하게 표명하였다. 위그노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한 생제르맹 칙령(1월 칙령)에 기즈 가문이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실은 위그노의 저항을 막도록 특출 난 장군들을 앞장세워 프랑스인 군대에 외인부대를 추가한 거대 규모의 왕군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왕군이 동원되는 동안 위그노 군대는 여러 중요한 거점도시들을 장악하였다. 위그노 군대는 지도력과 사기와 숫자에서 왕군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군대를 지원하는 재력도 견고하게 다져졌다.

위그노는 승리하는 곳곳에서 가톨릭의 성상 파괴를 일삼았다. 도시가 함락되면 약탈에 이어 성당, 성상, 기물이 파괴되었다. 성상 파괴의 동기는 다양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하층민의 몰지각한 난폭 행위나 단순히 탐욕이 아니었다. 성상 파괴는 성상이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성상을 파괴함으로써 위그노들은 십계명을 준수하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또한 성상파괴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였다. 가톨릭에 회복할 수 없는 물질적 손해를 끼침으로써 과거로 회귀하는 기회를 근절하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가톨릭 군대가 도시를 점령한 결과도 폭력, 약탈, 학살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가톨릭은 위그노가 예배 장소로 사용하던 헛간을 파괴하고 회중을 살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약탈은 약탈로 앙갚음 되었다.

제1차 전쟁에서 가장 험악한 전투는 1562년 12월 19일 드류(Dreux)에서 벌어졌다. 양군은 2시간 동안 서로 마주 바라보기만 하였다. 프랑스 사람끼리의 전투이기에 상대편에 형제, 친척, 친구, 동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첫째 단계에는 위그노가 선공에 나섰다. 이때 왕군의 대원수가 생포되었다. 둘째 단계에는 가톨릭 스위스 용병이 위그노의 예봉을 정면으로 맞섰다. 위그노의 독일 창병이 방어에 가세했지만 격퇴당했다. 셋째 단계에는 가톨릭 스페인 중기병이 위그노 보병을 궤멸시켰다. 이때 위그노 지도자 꽁데가 생포되었다. 넷째 단계에는 꼴리뉘 제독이 이끄는 위그노가 승리하는 듯이 보였지만 밤이 깊어지면서 피아 구분 어려지자 양군은 퇴각하였다.

드류 전투의 결과는 승리를 가리기 어려웠다. 이 전투는 16세기에 최악의 유혈 전투였다. 극심한 추위로 부상자 가운데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하루 동안에 5천 명에서 9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어떤 이는 2만 5천 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드류 전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첫째로,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기 위해 다수의 귀족과 많은 병사를 잃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이다. 또한 드류 전투처럼 양쪽 군대가 전면전을 벌이는 것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다. 마지막으로,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의 감성이 극도로 무디어져서 동족끼리도 살육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563년 2월 18일, 제1차 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일어났다. 바씨 학살의 주인공 프랑수와 기즈가 위그노 귀족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된 것이다. 그는 꼴리뉘와 베자의 지시를 따랐다고 지목했지만 나중에 그 주장을 철회하였다. 위그노 지도자들은 법질서를 지키는 것에 상당히 신경을 썼고, 개인이 합법적 행정관이 시행하는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 신의 영감을 주장하면서 “폭군”을 살해하는 사상을 극렬히 거부하였다. 꼴리뉘가 연루되었을 의혹은 남아있다. 이것은 기즈 가문과 꼴리뉘 가문 사이에 보복전이 반복되는 불행을 낳았다.

제1차 전쟁은 1563년 3월 19일에 발표된 엉부와즈 칙령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칙령은 가톨릭과 위그노 양쪽에서 환영받지 못하였다. 교황과 가톨릭 세력은 이것을 불법으로 정죄하였다. 반면 위그노는 칙령에 서명한 꽁데가 대의를 배신한 것으로 비난하였다. 왜냐하면 엉부와즈 칙령은 1월 칙령이 제공한 권리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