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2] 사건과 함께: 뿌와씨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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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뿌와씨 회담

1559년 5월, 파리에서 열린 제1차 총회 이후 위그노 교회는 마치 뻥튀기하듯이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였다. 12년 전 첫 교회가 설립되고는 1555년에 다섯 교회였다가 1559년 제1차 총회 때는 72개 교회로 발전하였는데, 1561년 후반에는 자그마치 2,150개의 교회로 성장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위그노 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한 여러 요인 가운데 특히 흡수와 공급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중요하다.

이 시기에 위그노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계기가 발생하였다. 국왕 앙리 2세가 마상시합에서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자, 15살의 어린 아들 프랑수와 2세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프랑수와는 한 해 전에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와 결혼한 상태였다. 메리의 외삼촌은 기즈 가문이었는데, 골수 가톨릭 집안으로 위그노에 극심한 혐오를 나타내고 있었다. 기즈 가문은 메리 왕비를 등에 업고 왕실에서 외척 세도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기즈 가문은 정통 프랑스 귀족이 아니라 동북부 국경지역 로랜느의 호족이었기 때문에, 기즈 가문의 이질적 태생을 비방하는 많은 귀족이 기즈 가문의 득세에 반감을 품고 신교 진영으로 기울어지는 현상을 일으켰다.

또한 프랑스에 신교 신앙이 홍수처럼 공급되었다. 깔방이 이끄는 제네바 목사회는 1555년부터 1562년 사이에 118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 가운데 무려 88명이 프랑스로 투입되었다. 선교사 파송은 제네바 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선교사들은 순교의 각오로 전도를 감행하였고(실제로 10명이 순교하였다)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위그노 신앙을 받아들였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남부에 자리 잡은 나바르 왕국의 여왕 쟌느 달브레는 1560년 성탄절에 제네바의 베자를 초청하여 설교를 들은 후 위그노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공식화하였다. 이로써 쟌느는 위그노의 정치적 수장으로 부상하였고, 위그노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힘을 얻은 셈이 되었다.

앙리 2세가 사고로 사망한 후에 왕후 까뜨린느 드 메디시가 섭정을 맡았다. 장남 프랑수와2세가 겨우 17개월 동안 재위하고는 17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왕비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하고, 왕권이 열 살밖에 되지 않는 차남 샤를 9세에게 이양되었다. 그 사이에 가톨릭과 위그노의 종교적 간격은 정치적 간격으로 심화되었다. 양쪽의 격한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어린 아들의 왕권을 지켜보는 섭정 모후의 근심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까뜨린느는 가톨릭과 위그노를 화해시킬 요량으로 양쪽의 대표자들을 초청해서 종교회담을 열었다. 회담은 1561년 9월 8일부터 10월 18일까지 파리에서 서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뿌와씨(Poissy)에서 진행되었다.

가톨릭 대표로는 프랑스의 추기경들, 교황의 사절 2명, 38명의 대주교와 주교, 그리고 박사들이 참석하였다. 위그노 대표로는 제네바의 베자와 취리히의 버미글리를 비롯한 12명의 개혁파 신학자가 참석하였다. 독일에서 오기로 했던 개혁파와 루터파 신학자들은 회담이 파산된 후에야 비로소 도착하였다. 왕실에서도 양쪽 대표가 참석하였다. 국왕 샤를르와 모후 까뜨린느 그리고 왕자들은 가톨릭을 대표하고, 부르봉 가문의 엉뚜완느와 쟌느 달브레, 그리고 왕자 앙리(후일 국왕 앙리 4세)는 위그노를 대표하였다. 경비병도 양쪽에서 왔다. 가톨릭은 왕실 경비병을 세웠고, 위그노는 스위스 경비병을 세웠다.

회담은 성찬론에서 극심한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특히 “하늘이 땅에서 먼 만큼, 그리스도의 몸은 빵과 포도주에서 멀다”는 베자의 신랄한 화체설 비판으로 말미암아 회담은 미궁에 빠지면서 결렬되고 말았다. 화해를 위한 모후의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그러나 회담이 결렬되기는 했지만, 위그노 진영은 한편으로는 왕실과 가톨릭에 신교 신앙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기회를 얻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 밖 비공식 장소에서는 위그노 예배를 허락한다는 생제르맹 칙령(1월 칙령)을 끌어내었다. 이로써 위그노는 나름대로 짭짤한 이득을 챙긴 셈이 되었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