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한 싸움의 선봉자”(딤후 4:7~8)_김정태 목사

0
71

“선한 싸움의 선봉자”(딤후 4:7~8)
故 김태운 목사 위로예배(2023년 11월 7일 화요일)에서 행한 설교

김정태 목사(증경총회장, 송도중앙교회 원로)

故 김태운 목사님의 별세를 진심으로 애도하오며 유족들의 슬픔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전도자로서 복음을 위해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선한 싸움을 싸우며 주님의 사역에 헌신하였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음을 회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볼 때 故 김태운 목사님께서도 사도 바울같이 선한 싸움에 삶을 사셨다고 말씀하고 싶습니다.

저가 1972년 9월에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2년간 같은 노회에서 지내면서 합동측 총회가 분열되는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故 김태운 목사님은 선한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본문의 선한 싸움이란 어두움의 세력과 악한 영들 정사와 권세자들과 대항해 왔던 싸움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불의와 불법, 교권 횡포 등. 악한 세력에 맞서 싸운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딤전 6: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故 김태운 목사님이 우리 합신 교단의 초대 총회장이었기에 교단의 역사를 간단히 언급하면서 말씀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대로 1970년대에 들어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교단은 지방색으로 말미암은 영남과 호남의 교권 갈등이 커지고 결국은 금권정치까지 개입하여 더욱 혼란스런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그 문제의 핵에는 당시 합동측 총회에서 십수년간 임원과 서기로 활동하던 이영수 목사(대전중앙교회)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총신대 재단이사회 서기가 되어 교직과 학사에까지 관여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이와 같은 혼란의 일환으로 비주류의 총회신학교 복구위원회가 조직되어 정규오 목사(광주중앙교회)와 함께 박아론 교수가 새로운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여 총신을 떠났고, 1979년 3월에 방배동에 비주류의 총회신학교를 세웠습니다.

1978년 11월 7일 박아론 교수 사태에 대하여 심각한 충격을 받은 총신대 신대원 1학년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채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구호를 내걸고 총회 분열을 염려하는 금식기도회로 모였고, 얼마 안 되어 전교생 기도회로 발전되었습니다. 이것이 총신대 학생운동의 시작이며, 1980년 봄학기 시작과 함께 학생 대표들에게 무기정학과 퇴학이라는 징계가 발표되었습니다(합신 30년사, p.20~22 참고). 이것이야말로 불법과 불의, 무소불위의 교권 횡포라 하겠습니다.

요한1서 3장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하였으니 당회, 노회, 총회는 반드시 총회헌법을 준수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1979년 9월 20일~24일에 대구 동부교회에서 제64회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가 개최되었으나, 교회 대문을 굳게 잠그고, 교회 담벽은 각목을 든 청년들이 수비하는 등. 그런 상황에서 대구 서문교회 이성헌 목사를 비롯한 많은 총회 총대들과 당일 전남노회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올라온 총대들도 총회 장소까지 왔으나 이미 이영수 파가 점거하여 교회 안 입장을 막았습니다(합신 30년사, p.27~28).

이때 노진현 목사와 김경호 목사 등이 임원 선거를 중지하고 교회 밖에 서 있는 총대들을 회의 장소에 들어와 함께 임원선거를 하자고 간곡히 발언했지만, 이영수 목사 측이 자기끼리 총회를 강행하여 임원선거를 하였고, 정규오 목사 측은 대구 은일교회(김은하 강도사)에서 총회를 개회하고 난 후, 1979년 11월 5일 서울 청암교회(이환수 목사)에서 소위 비주류측 총회가 속회로 회집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식의 교권 투쟁으로 주류와 비주류는 분열하는 불행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합동측 제43회 총회장을 역임한 노진현 목사(부산 새중앙교회)는 교단의 분열을 안타까워하면서 합동을 위해서 심혈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 후 전국 각 지방에서 많은 목사님들이 합동에 동의하고 합류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울 새순교회(윤남중 목사)에서 약 200명이 참석하여 총회 합동추진연합회를 구성하고 노진현 목사를 위원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는 목사들은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대학생선교회(CCC) 회관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5, 6백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합동추진위원회는 2여년간 합동의 길을 모색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습니다.

그 무렵 총신대에서 박윤선 박사를 비롯하여 신복윤 교수, 김명혁 교수, 윤영탁 교수, 박형용 교수와 약 300여명의 신대원 학생들이 1980년 10월 총신 이사회의 불법적인 교권 간섭을 거부하고 총신대에서 나와 서울 신반포에 소재한 남서울교회(홍정길 목사)에서 개혁신학교란 간판을 걸고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 국가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시해를 당하였고, 1980년 8월에 출발한 전두환 씨가 주도한 군사정부는 무인가 신학교 정비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문교부장관은 이규호 씨였고, 1980년 11월 29일 발표된 문교당국의 무인가 신학교 정비계획에 따르면 각 교단의 추천을 받은 교육기관에 한해서 1년동안 시설을 보완하도록 유예기간을 두고 대학설치 기준령에 맞도록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주간 신문의 광고면에 나오는 학교 220여개교 중에 37교만 교육부 인가를 받았고, 180개교는 무인가였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합신도 고려할 가치가 없는 무인가 신학교로 취급될 처지였습니다(합동신학대학원 20년사).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합동신학교는 무인가 신학교 정비에 들어가지 않고 교단이 있는 순복음신학교와 중부신학교와 함께 설립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당시 중립측 대표로 노진현 목사가 문공부에 등록되어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봅니다. 김명혁 교수도 합신 30년사 역사편찬위원회에서 긍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총회 설립도 소집 전에 2번의 준비모임과 기도회를 성결회관, 에덴기도원에서 가진 후 1981년 9월 22일 오후 6시 30분에 남서울교회(홍정길 목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파)라는 이름으로, 회기는 장로회 총회 역사를 계승하여 제66회 총회로 개회하였습니다. 새 총회는 준비위원장이었던 김태운 목사의 사회로 개회예배, 기도는 서운선 목사, 설교는 박윤선 목사(행 9:26~31, 장성하는 교회), 축도는 노진현 목사로 드렸습니다.

총대 수는 목사 41명, 장로 38명, 계 79명이 참석하여 임원선거를 한 결과 초대 총회장에 김태운 목사가 선출이 되었고, 기타 임원들과 상비부 조직까지도 갖추어 합신총회가 창립이 되었습니다. 이래서 합신 1회 졸업생들이 강도사 고시를 치르고 사역에 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역사적인 일에 김태운 목사가 선봉자가 되셨습니다.

특히 그 당시 국가와 사회의 혼란과 교계의 불법과 부패, 교권횡포에 맞서 대항하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 총회(교단)와 합동신학교는 운명적으로 만나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이념으로 하여 구현하게 됨은 시대적 사명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잘 감당하도록 할 것입니다.

끝으로 故 김태운 목사는 100세까지 장수의 삶을 사시고, 여러 믿음의 후손들을 남겨두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으니, 유족들은 위로를 받으시고 주안에서 가족들이 화목하고 목사님의 자녀들로서 신앙과 생활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