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16] 사건과 함께: 첫 순교자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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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첫 순교자

정확하게 오백년 전 프랑스에 신교의 첫 순교자가 생겼다. 1523년 8월 8일, 쟝 발리에르가 파리에서 산채로 화형을 당했다. 그는 본래 노르망디 출신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종단 수도사였는데, 동정녀 마리아를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프랑스 종교개혁의 첫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화형장소는 돼지 판매 시장이었다. 발리에르 화형과 함께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서적들이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불태워졌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은 열네 살의 쟝 깔방이 파리 몽때규 학교에 도착한 주간에 벌어졌다. 이 때문에 발리에르의 화형과 루터 서적의 소각은 소년 깔방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

루터의 신학이 파리에 유입된 것은 1519년 초엽부터였다. 1521년 4월 15일, 루터는 소르본 대학으로부터 가톨릭의 유해한 적으로 선언되었다. 두 달 후에 파리 의회는 소르본의 허가를 받지 않은 종교서적의 출판을 전면 금지하였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신교 박해는 1521년부터 공식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발리에르가 프랑스 신교의 역사에 첫 번째 순교자로 자리 매김한 이후, 당시 박해를 주도한 소르본 대학, 파리 의회, 가톨릭교회, 그리고 왕권에 의해 위그노들은 끊임없이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신교 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번지면서 발리에르의 뒤를 따라 리용, 그르노블, 모, 블루와, 루앙 등 여러 도시에서 순교자 행렬이 우후죽순처럼 이어졌다. 순교자들의 범위는 사회의 모든 계급에서 나왔을 정도로 아주 다양했다. 사제, 수도사, 귀족, 지식인, 법조인, 의사, 목사, 행상인, 전문인, 노동자 등등이다. 그러나 박해의 초기에는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신교 신자들이 기소되어 정죄당하고 형벌을 받았는지 이름과 수효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단을 화형 시키면서 재판 과정의 문서들도 함께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신교 신자들의 처형에 관해서는 오직 파편적으로만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는 주로 두 곳이 신교 신자들을 사형에 처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센 강 오른쪽(북쪽)의 사형장은 그레브 광장(현재 파리 시청 광장)이었다. 센 강을 운항하는 화물선들은 밀, 목재, 그 외에 다양한 물품들을 그레브 광장 강둑에 하선하였고, 물품들은 이곳에서부터 파리 전역으로 운송되었다. 이 광장에는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언제나 붐비면서 온갖 종류의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공개 사형장소로 적합하였다. 센 강 왼쪽(남쪽)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바라보는 모베르 광장이 사형장으로 사용되었다. 모베르 광장이란 이름이 붙은 까닭은 13세기에 모부스 박사(Albertus Magnus)가 이 근처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관습대로 자기 집에서 자유롭게 토론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프랑스 신교는 모베르 광장 같은 공개 처형지에서 검게 불타버린 유골 가운데 태어났다. 한 마디로 말해서, 순교 장소는 프랑스 위그노의 요람이었다.

그러면 목숨을 앗아가는 박해 앞에서 위그노 운동은 위축되거나 중단되었는가? 떼오도르 베자는 앞으로 박해를 받는 위그노 교회가 가슴에 길이 품어야 할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망치들을 소모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모루이다.” 이후 베자는 “교회사”(1580)를 출판하면서 표지에 “모루와 망치”를 삽화로 인쇄하였다. 군병들이 손에 망치를 들고 모루를 내려치는 장면이다. 모루 아래는 깨지고 부러진 망치들이 떨어져있다. 삽화는 둘레에 “나를 때리기를 즐길수록 망치들은 더 소모된다”는 의미를 가진 글귀를 두르고 있다. 베자의 경구가 보여주듯이 가톨릭은 망치처럼 위그노를 탄압했고 위그노는 모루처럼 박해를 이겨냈다. 박해자들은 위그노 운동을 멈추게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인명과 재산을 희생시켜야 했다.

박해와 순교로 점철된 위그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당시처럼 목숨을 내놓는 큰 순교는 아니지만 일상 속에서 신앙을 위해 무엇인가를 손해 보는 작은 순교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