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선교사들 방문과 격려
중앙아시아 선교사들을 찾아간 사람들
여름의 끝자락 8월 28일 – 9월 2일 중앙아시아를 다녀왔다. 참가자는 증경총회장 김기영 목사, 증경총회장 최칠용 목사, 북방지역 후원회장 조봉희 목사, 증경노회장을 역임하고 또한 합신선교부 이사로 수고하는 정운기 목사, 박군식 목사, 장덕형 목사, 김태흥 목사, 정정식 목사, 나경수 목사, 그리고 송병례 사모, 이영숙 사모, 황은숙 사모, 백현주 사모, 홍현주 사모이다. 그리고 합신선교부 총무를 역임한 유기남 선교사 및 현지에서 공 선교사, 김 선교사, 황 선교사, 노 선교사, 박 선교사로서 총 20여 명이 함께 하였다.
강제 이주의 현장 우슈토베
현지 교회들과 첫 정착지 우슈토베를 중심으로 방문하였다. 카작어로 ‘세 개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알마티에서 북쪽 400km 거리에 있다. 3시간 정도면 간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탄 버스는 6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이곳은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당한 첫 정착지이다.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이라 불릴 정도로 추운 곳이다.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출발지인 연해주 라즈돌로예에서 우슈토베까지의 거리는 7,166km에 이른다.
우슈토베에 정착한 한인들의 역사
1937년 10월 9일, 시베리아에서 한 달간을 달려온 기차가 마지막으로 멈추어 선 곳은 정거장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겨우 버티어온 96,256명의 한인들은 황무지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들은 나지막한 언덕을 바람막이 삼아 자리를 정하였다. 도구가 없어 맨손과 숟가락으로 땅을 파서 가족 단위의 토굴을 만들었다. 안쪽은 아이들과 여인들이 들어가고, 바깥쪽은 남자들이 자리잡고 엄동설한의 추위를 이겨내야 했다. 이주 첫해 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다. 대략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를 불쌍히 여긴 현지인들이 간간이 던져주는 고기와 빵으로 심한 허기를 채워야 했다. 눈이 녹고 봄이 다가오자 멀리서 물을 끌어와 품어온 볍씨를 심어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임마누엘연합교회와 고려인박물관 방문
이곳에 20년 전부터 사역해온 재미 한인 박 선교사가 있다. 그의 남편은 얼마 전 모스크바를 다녀오던 중 테러로 인해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그녀와 현지인 동역자들은 재미교회들의 후원으로 세워진 임마누엘연합교회와 부설인 고려인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가 교회 앞마당에 도착하자 박 선교사는 환한 얼굴로 맞이한다. 이렇게 큰 대형버스가 이 동네에 온 것은 처음이라고 놀라워한다. 보통은 봉고를 타고 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우리도 다소 놀랐다. 오는 길에 버스가 잘 안 보였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알마티에서도 시내버스들 외에는 대형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았다. 도로 사정상 작은 자동차들이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문의 기쁨, 환영의 즐거움
안내를 따라서 건물 2층에 올라가니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방들이 여럿 보였다. 미주와 한국에서 리서치 그룹이나 단기 팀들이 가끔 온다고 한다. 목사님들이 많이 와 봤으면 하고 내심 바랬는데, 오늘은 목사님들이 대거 오니 기도가 응답된 것 같아 무척 기쁘다고 한다. 교회 식당에 들어가니 한식이 준비되어 있다. 모두 얼마나 기뻐하던지. 점심 메뉴가 국수라고 들었는데 비빔밥이 나온 것이다. 외국에서 데친 나물들과 고추장을 밥에 비벼 먹는 감동은 남다르다.
17만 고려인과 후손을 위한 기도
식사 후에 예배당으로 이동해서 여러 곳으로 흩어진 17만 명 카레이스키(고려인)와 그 후손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초기 정착민들이 살던 토굴과 움막들, 남겨진 기구들을 둘러볼 때는 모두가 숙연해졌다. 일부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머나먼 동토 이방 땅에서 살아남아 오늘날은 이곳의 유대인으로 불릴 정도로 사회와 비즈니스에서 번성하여 축복을 나누는 민족이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이리라.
일반적인 여행에서 오는 즐거움은 복음 안에서 선교지를 탐방하고 만나고 교제함에서 오는 신령한 기쁨에 감히 비할 수 없다. 중앙아시아 선교사들은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준 목사님과 사모님들을 만남을 통해 큰 격려와 힘을 얻었다. 변방에 홀로 떨어져 있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과 합신 선교사로의 자부심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유기남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