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 장대선 목사, 가마산 교회 >
“세계의 원인과 종국을 하나님께로 두는 지식만큼 신앙생활도 일관성 가져“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지식’(knowledge & understanding)은 사실 절대로 중요하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흔히 신앙에서 요구되는 것은 ‘지식’보다는 ‘의지’와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지나 감정이 지식과 무관하게 활동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의지와 감정에 지식이 결여될 때에 흔히 발생하는 것이 바로 오류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지식을 바탕으로 의지에 따른 마음의 감정이 총체적으로 사용되는 복합적이고도 총체적인 헌신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그런 총체적인 헌신에 있어서 특히 지식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지식이 풍성한 만큼 의지와 마음이 풍성하게 동반되기(실감하기) 때문이다.
심미안(審美眼)이 있을 때 예술품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기쁨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의 지식이 풍성할수록 신앙과 삶의 총체적인 적용과 헌신이 동반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개신교 신앙에서 볼 수 있는 무기력과 무능은 개개인으로서의 개신교 신자들의 무지와 개신교 전체의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리트머스의 색깔이다.
그런 리트머스지의 색깔이 어떤 색깔인지를 생각해 볼 때에, 그 색깔이란 한마디로 ‘이원론(dualism)’ 혹은 ‘이신론(deism)’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불신자들이나 이교도들은 차치하고 신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대부분의 신앙과 삶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신론의 패턴 가운데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태초의 창조주 하나님은 인정하면서도,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은 개별 존재들의 질서와 의지 가운데서 철저한 인과율로 점철되는 것이라는 사고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것이 바로 현대 개신교 신자들의 기본적인 바탕인 것이다.
그런 사고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래 전에 세상을 창조하셨거나, 가장 최근에 나(개별인간) 자신을 창조하셨어도, 지금 현재는 나의 의지와 수고, 그리고 나의 지혜와 경륜으로 살아간다는 전제가 실생활에 거의 본능을 이루다시피 한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사고해보면, 창조는 아주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어제, 그리고 오늘,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있는 전적이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능력이요 역사로 있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신자들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실감 가운데서 비로소 총체적인 헌신, 그리고 연보(捐補)가 유발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출생에서만 창조주로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과 시간 가운데서 항상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궁극적인 창조주로서 여전히 역사하시는 그런 창조주이시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 심장의 박동과 폐의 팽창과 수축, 그리고 혈액과 공기의 흐름 정도밖에는 탐지하지 못하지만, 그 모든 박동과 흐름은 우리들 자신의 의지를 원인으로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원인에 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소득에 대해 재화와 용역의 흐름까지밖에 추적하지 못하지만, 그런 재화와 용역의 흐름도 수많은 우리들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원인을 두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원인을 둔 것일 뿐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있는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거시적 세계에서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모든 미시적 세계에서나 모든 원인과 종국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만큼 우리들은 신앙과 생활에 있어 철저히 이신론적이지만, 그런 모든 세계의 원인과 종국을 하나님께로 두는 지식의 풍성함만큼 우리들의 신앙과 생활은 더욱 일관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과 무관하게 혹은 독립적으로 세계가 있었던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하나님과 무관한 미래나 역사는 결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세계 한가운데 있는 우리, 아니 나 자신에게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이 사실을 직시하는 만큼, 이 진리를 실감하는 만큼, 이 실상을 바라보는 만큼 우리들은 지금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였고 창조하시며 창조하실 하나님의 바라는 바 목적을 따라 신앙과 생활로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