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엘리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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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없다

연중에 하루라도 스승을 기리는 날이 있다는 것은 정말 잘된 일이다. 매일같이 밀려드는 크고 작은 일에 쫓기며 선생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그 날이 다가오면 문득 머릿속에 선생님들의 모습이 안개처럼 뿌옇게 떠오른다. 그 모습들은 저 멀리 기억 속에 아스라이 숨어 있다가 스승의 날을 알리는 달력과 함께 활동사진이나 되듯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난다. 그럴 때쯤이면 아무데나 쑤셔두었던 누렇게 변한 옛 앨범을 마술에 걸린 것처럼 나도 모르게 펼쳐들고는 여기저기를 뒤적거린다. 이제는 사진 속에 웃고 있는 젊은 선생님들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은데도 희한하게 여전히 그분들은 어렵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눈을 들면 스승이 없는 현실로 돌아온다.

스승이 없다. 세상에 부모를 여읜 것만큼이나 슬픈 일은 스승이 없다는 것이다. 지나온 길을 정리해 주고 앞으로 갈 길을 지도해 줄 스승이 없다는 것은 돌아갈 집이 없이 여행하는 것이나 숙박할 방이 없이 여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통과한 선생님이 곁에 계셔서 뒤죽박죽된 우리의 과거를 털어버리게 하고 두려움으로 맞이해야 할 우리의 미래를 헤아리게 해 준다면 정말 좋으련만.. 정신을 배우며 인생을 맡길 선생님이 없으니 닻을 잃은 채 이리저리 쫓겨 가는 배와 같고, 대화를 나누며 조언을 구할 선생님이 없으니 방향타가 잘린 채 아무데나 날아가는 비행기와 같다.

스승이 없다. 그나마 옛 선생님들이 사라진 자리에 새 선생님이 채워진다면 다행이겠건만 현황은 그리 단순해보이지 않는다. 스승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현시대에 교육의 회의주의가 팽배한 까닭이다. 오늘날은 스승이 존경 받지 못하는 시대이다. 지금 우리는 제자를 길러 봐야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이런 현실에 편리를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가세한다. 자기 인생만 살기에도 힘겨운데 구태여 골치 아픈 제자까지 치다꺼리하며 힘들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누구도 선생이 되려는 인품을 갖추지 않고 실력을 쌓지 않는다. 따라서 사상은 계승되지 않고 전통은 전수되지 않는다.

스승이 없다. 어찌 보면 옛 선생님의 자리를 채우려 하지 않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더 큰 문제는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스승을 삼으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스승이 있는 것을 귀찮고 불편하게 여기며,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시대의 알량한 조류에 맞게 스승이 있어도 따르지 않는다. 교육과정 동안에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자세로 자기에게 유익한 지식과 정보를 얻어내기에 바쁘고, 교육과정 후에도 자기에게 실속 있는 단물을 빨아먹고 알짜를 빼먹기 위해서는 눈웃음을 흘리다가도,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언제 봤냐는 식으로 더 이상 스승을 찾지 않는다. 처음에는 소통이 줄어들고 다음에는 연락이 끊어진다. 스승을 찾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심지어는 험담과 비난까지 늘어놓는다.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 엘리야도 없고 엘리사도 없다. 제자를 양육하지 않는 교사는 정신이 시들다 못해 썩어버린 사람이고, 선생을 기억하지 않는 학생은 영혼이 병들다 못해 죽어버린 사람이다. 제자 없는 교사는 열매가 없는 나무인 셈이고, 선생을 잊은 학생은 뿌리가 없는 나무인 셈이다. 선생은 제자를 기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미래를 포기하고, 학생은 교사를 망각함으로써 스스로 과거를 부정한다. 선생들은 라헬처럼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지 못하고(렘 31:15), 후학들은 맹인같이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더듬는다(사 59:10).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는 까닭에 어디에서도 어려운 시대를 감당할 방도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유대교가 역사의 심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대로 이어진 선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대로부터 후대로 끊임없이 계승된 교사들의 가르침은 광야생활과 포로시기와 식민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유대교를 견지하는 중대한 동력이 되었다. 왈도파는 바르베(Barbe)라고 불리는 교사들이 있었기에 피로 얼룩진 박해를 이겨내고 어둠에서도 생존하는 동인을 얻었다. 가톨릭과 왕정이 합세하여 수백 년 동안 말살 시도를 했지만 왈도파의 심장에서 교사들의 가르침을 뿌리 뽑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표류하는 이 시대 앞에서 낙담하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엘리야 같은 스승이 없고 엘리야를 스승으로 따르는 엘리사 같은 제자가 없는 현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