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박윤선 목사와의 만남 1] 방지일 목사가 기억하는 박윤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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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지일 목사가 기억하는 박윤선 목사

 

 

박윤선 목사님은 철산 장평리에서 출생하셨고, 부모님은 믿지 않고 형님이 먼저 믿었습니다. 부인이 사람이 참 좋았는데 까막눈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을 공부 시켜야겠는데 부모의 허락을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밤에 몰래 부인을 업고 나와서 20리를 걸어나와 차를 타고 선천에 있는 보성여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숭실학교를 부부가 같이 나왔습니다. 그 때 장남 춘호와 딸 춘자를 낳았습니다. 큰딸 춘자가 이상근 박사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신학 공부할 때 윤선이는 영어 교과서를 1권부터 5권까지 다 외우고 영어를 잘했습니다. 서양 선교사가 와서 설교를 하면 꼭 교장이 윤선이를 통역을 시켰습니다. 윤선이 밖에 그렇게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영어로 다 외우고 라틴어로도 다 외우고 한국말로도 다 외우지 않습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방 하나를 얻어서 같이 지냈는데, 부인이 밥하는 동안 윤선이는 자기 책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윤선이는 좌우간 책을 보게 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때 큰 아들 춘호가 돌 지났을 때였는데, 자다가 깨서 윗간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버지한테 찾아온 겁니다. 그 윗간에 찾아와서 장판에 똥칠을 다 하고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아버지를 잡는 겁니다. 아버지 의자에도 똥칠을 하고 있는데, 윤선이가 그것을 모릅니다. 부인이 불을 때다가 들어와 보니까 똥칠하고 난리가 난 겁니다. 아이가 의자에 똥칠을 하면서 “아버지, 아버지” 하는데, 윤선이는 계속 책만 읽고 있으니까, 부인이 책을 뺏어서 이거 가져다가 불 때야 한다고 하니까 윤선이가 “여보, 여보, 그것만은… 그것만은…” 하며 책을 빼앗아 도망갔다고 합니다.

평양에 살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윤선이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그 고향인 장평리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교회식으로 했습니다. 아들들이 교회식으로 하니까 어머님이 제사상 없는 것이 너무 분해서 밥상을 차려놓고 거기다가 영감 사진을 올려놓고서 “영감, 내가 잘못한 게 뭐 있소. 아들 형제들이 불효해서 아버지를 굶기니 어떻게 하겠소. 내가 이거라도 차려왔는데 좀 잡수오”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윤선이가 이것을 보고 그 사진을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이놈의 새끼” 하면서 부엌에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죽이고 만다. 아비 굶어서 내가 좀 드리려고 했는데… 이 못된 놈의 새끼” 하면서 쫓아와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 아들이랑 화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숭실학교 졸업할 때 어머님이 왔습니다. 그 때 내가 “어머님, 이제 윤선이 졸업하면 며칠 있다가 목사가 되는데, 어머님이 이렇게 안 믿으면 되갔소” 하고 말했더니, 어머님이 성을 바짝 내면서 “방지일, 너 가라우! 나하고 말하지 말라우! 공부를 그만큼 하게 했는데 면장도 한 자리 못하면서” 라고 말하신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머님한테는 면장이 제일 높은 겁니다. 그때 내가 제안해서 윤선이랑 진홍이랑 같이 어머님이 믿도록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이 어머님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얼마나 부흥했는지 모릅니다. 장평동교회였습니다. 철산에 있습니다.

어머님이 예수를 믿게 되고 그 다음에 심지어 주일 낮에는 교인들에게 밥까지 해 먹이는 겁니다. 가난했는데도 아끼던 장까지 퍼주고, 전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 때가 칠십이 넘었을 겁니다.

<박윤선과의 만남, 안만수, 영음사, 2013>에서

 

* 영음사의 허락을 얻어 도서 <박윤선과의 만남>의 내용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